쿠데타의 기술
어떤 책을 많이 팔고 싶으면 마케팅을 하고, 엄청나게 많이 팔고 싶으면 정부가 금서로 지정하면 된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말라파르테의 책 <쿠데타의 기술>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 어수선하던 시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쿠데타들을 검토하여 쿠데타의 ‘전략’을 파악해낸 책은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된 탓입니다. 그의 본국인 이탈리아는 물론 독일, 스페인, 폴란드 등의 국가에서 <쿠데타의 기술>이 금서로 지정됐는데, 그 과정에서 황당한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쿠데타의 기술>이 금서로 지정된 것은 반란 모의 혐의로 체포된 슈타렘베르크(starhemberg) 공의 서재에 이 책이 있었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상이던 돌푸스(dolfuss)는 이 책이 위험하다며 판매를 금지했죠. 그런데 몇 년 뒤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며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작 돌푸스 수상이 살해당하던 시점에 그의 책상 위에는 이 책이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책을 열심히 찾아 읽는 반란세력(?)은 물론이고, 책을 금서로 지정한 기존 집권세력 에게도 두루 읽힌 진정한 의미의 베스트셀러인 셈입니다.
여기에 국내 번역서는 하나의 강점이 더 있습니다. 단순히 원문을 번역하는 것을 넘어, 말라파르테의 책에 나온 오류를 정말 꼼꼼하게 역자 주석으로 바로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소개하겠지만, 말라파트테는 본인이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일원으로 무솔리니의 쿠데타에 참여한 경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책의 목표 자체가 ‘이념’에 의한 설득보단 쿠데타의 ‘기술’에 치우쳐져 있다 보니 기술 외적인 영역을 평가절하하는 경향도 강한데, 역자분들께서는 이를 현재 주류 학설과 비교해 매섭게 바로잡아 줍니다. 저자 사후 출판의 이점이 극대화된 거죠.
서론이 길었습니다. 나폴레옹에서부터 레닌과 트로츠키, 스탈린, 무솔리니에서 히틀러까지.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고, 그 과정에서 동원된 전술은 어떤 것일까요?
쿠데타가 공격할 대상은 의회가 아니다
잠시 상상력을 한 번 발휘해봅시다. 여러분이 여러분 나름의 혁명을 위해 국가 전복을 꿈꾼다고 해봅시다. 쿠데타를 감행할 최소의 인원은 모였다고 할 때, 과연 어떤 곳을 점령해야 할까요? 청와대? 국회의사당? 서울 정부청사? 몇 군데의 주요 정부시설이 떠오르시겠지만, 말라파르테는 전혀 엉뚱한 곳을 짚습니다. 의회나 총리 관저 같은 정부 기관이 아니라, 발전소와 전화국, 수도국 같은 곳을 공격하는 것이 실제로 국가를 장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저자는 이를 트로츠키가 추진한 볼셰비키 혁명의 사례를 이용해 소개합니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은 경찰과 사관학교 생도들을 동원해 주요 정부 기관을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었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볼셰비키 측에서는 이런 방어를 뚫을만한 병력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때, 젊은 혁명가 트로츠키가 나서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쿠데타를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합니다. 강력한 병력을 동원해 국가기관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마비’시키기만 해도 충분히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트로츠키는 약 1,000명의 혁명 대원들을 2-3명씩 묶어 조를 편성하고, 이들을 방송국과 발전소, 수도국, 석탄 창고, 밀 창고 등의 국가 인프라 시설에 파견했습니다. 조원들은 본인들이 맡은 기관에 침투하는 연습을 ‘평상복’을 입고 진행했고, 경찰은 물론 해당 시설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이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쿠데타 날이 오자 미리 ‘보이지 않는 훈련’을 끝마친 조원들은 신속하게 해당 시설들을 접수했고, 집권세력은 국가 권력 시설을 잘 지키고도 국가를 탈취당하는 새로운 형태의 쿠데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런 새로운 쿠데타 전략 덕분에 소련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근대국가의 쿠데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저자인 말라파르테의 요지는 간결합니다. 그가 지켜본 많은 쿠데타를 봤을 때, 근대국가에서는 기존의 쿠데타 전술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기술(technique)’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거창한 이념도, 막강한 군대도, 특정한 시대적 배경이 없더라도 국가 기간시설을 조직적으로 점령하는 방식의 쿠데타는 전통적인 경찰을 통한 방비를 언제든 뚫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쿠데타를 방어하는 국가 역시 이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방어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말라파르테의 책이 양쪽에서 사랑(?)을 받은 이유가 이것이죠.
책에서 소개되는 쿠데타 파훼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트로츠키의 방법을 역으로 이용해 국가 기간시설 방어에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아닌 국민적 차원에서 쿠데타를 방어하는 방법입니다.
쿠데타의 방어 (1) - 비밀경찰의 시설 내 잠입
트로츠키는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한 혁명 단원을 이용해 국가 기간시설을 점령하는 방법이 효과적임을 실제로 증명해냈습니다. 경찰력을 동원해서 의회나 군 사령부 같은 권력기관을 열심히 지키더라도, 기간시설을 탈취하여 국가를 마비시키면 승리는 쿠데타 세력에게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이를 응용해서, 각 기간시설에 비밀경찰을 직원으로 위장해서 투입하면 어떨까요? 레닌 사후 차기 지도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이긴 것도 이와 같은 전술 덕분입니다. 트로츠키식 전술의 완벽한 파훼법이 개발된 것이었죠.
쿠데타의 방어 (2) - 노동자의 총파업
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독일은 군축 압력을 강하게 받습니다. 처음에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정규군 일부를 자유군단(Freikorps)이라는 비정규 의용군으로 재편했지만, 나중에는 승전국의 압박으로 자유군단을 해체하게 됩니다. 그러자 자유군단을 이끌던 이들은 정부의 조치에 반발해 베를린으로 진군하고, 볼프강 카프를 총리로 하는 쿠데타 정부를 수립합니다. 이들은 정부조직은 접수했지만, 국가 기간시설은 무방비로 내버려 두는 실책을 범했습니다. 이 기회를 노려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자 도시는 마비됐고, 결국 쿠데타 세력은 항복을 선언하고 도시를 빠져나오게 됩니다. 또 다른 형태의 쿠데타 파훼법인 거죠.
정말 기술적인 쿠데타가 전부인가?
1900년대 초반에 저자의 주장은 무척 파격적이었을 겁니다. 왕과 귀족들, 의원과 고위 관료를 붙잡음으로써 국가를 탈취하던 것이 기존의 전형적인 쿠데타였다면, 국가 기간시설을 점령함으로써 국가를 탈취한다는 새로운 방식의 쿠데타는 무척 생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을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역자들은 이런 서술에도 매서운 비판의 칼을 들이댑니다. 말라파르테가 본인의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쿠데타의 나머지 부분을 축소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 역시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트로츠키가 국가 기간시설을 점령했다고 한들, 국민적 지지가 없었다면 볼셰비키 혁명이 정말 성공할 수 있었냐는 겁니다.
가령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에서 공개된 녹취록의 일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류저장이 세계에서 가장 큰 데가 평택에 있는 유조창. 이거 세계에서 가장 큰 저장소에요. 그 탱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거기 뭐야 안에 있는게 니켈합금이에요. 그것은 관통하기가 어려워요. 더 중요한 문제는 뭐냐면 니켈합금을 감싸고 있는 것이 두께가 90cm에요. 벽돌로 시멘트로 그래서 그것이 총알로 뚫을 문제는 아니거든요. 우리가 차로 혼자 다이나마이트 싣고 와 가지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폭하되는 문제는 아닌 거에요. 이미 정부에서 테러범이 투입되고 소방 특공대가 들어가고 다 이미 있는거죠. 인천에 그런 시설이 있는 거죠. 우리가 조사를 해놨습니다.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 녹취록 중 일부
실제로 이런 구체적인 사전 조사를 통해 기술적인 쿠데타가 성공한다고 한들, 종북세력이 정권을 유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정 기간 국가의 마비가 유도되긴 하겠지만, 합법적 정치세력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과 신규 집권세력에 대한 암묵적 지지가 없다면 쿠데타 정권이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쿠데타인 5.16 군사 정변도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없었다면 일시적인 군사 점령에서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단지 ‘기술’만 있다고 쿠데타가 성공한다고 보긴 힘든 겁니다.
당사자가 쓴 격랑의 20세기 초를 읽다
그 외에도 책에는 다른 한계들이 있습니다. 말라파르테는 책 전반에서 쿠데타의 배경을 고의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강조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양해는 되지만, 말라파르테 본인이 속해있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의 쿠데타 과정 등 일부 사례는 거의 왜곡에 가깝게 서술했죠. 물론 100년이 지난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으로 본 역사와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던 역사적 행위자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작가 개인 차원에서 접할 수 있는 사실에도 한계는 있었을 테니, 그 이상을 요구하긴 힘든 일이기는 하죠.
이와 같은 단점을 고려하더라도, 격동의 20세기 초를 행위자 중 한 명이 생생하게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이만한 책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거기다 뼈를 갈아 넣은 듯한 역자들의 해제와 뒷부분의 인물 정보는 그 자체가 별도의 콘텐츠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저자의 오기는 물론이고 저자가 잘못 알고 있던 내용과 시대적 배경을 각 챕터별로 ‘개관’의 형태로 먼저 알려주니, 뒷부분의 잘못된 서술에 휩쓸릴 여지도 적습니다. 엉성하게 오역까지 나오는 허접한 번역서를 보다가 이 책을 읽으면 잘 된 번역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책 뒷부분의 해제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으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