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yam Oct 10. 2020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는 것

지구별약수터 캠페인 진행이 가져오는 다양한 생각들.

"신엄! 신엄!"

족히 100살은 되어보이는 할머니가 또랑또랑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버스기사아저씨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알암수다"

버스기사 아저씨도 지지않고 특별한 감정 없는 뚜렷한 목소리로 답을 한다.

빈좌석 없이 승객들이 탑승한 시외버스에 허리춤에 단단히 안전벨트를 한 꼬부랑 할머니의 모습은 동화책 속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일게 한다.  

'이번 정류소는 신엄...' 안내 방송이 버스 안에 울렸다.

"이거좀.. 이거좀 풀어줘."

제주시 버스터미널에서 할머니가 승차했을 때 버스기사 아저씨가 매준 좌석벨트를 손으로 만지작 거리던 할머니는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부탁 아닌 말을 다시 건넸다.

나는 벌떡 일어나 할머니 좌석으로 걸어가 달리는 버스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무릎을 꿇고 할머니의 좌석 벨트를 풀었다.

할머니는 나를 슬쩍 바라봤지만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버스가 정류소에 멈추고 역시 할머니라는 호칭에 익숙해 보이지만 몸이 상당히 날렵한 여자 승객이 버스에 올라서서 빈좌석을 찾아 서둘러 할머니 옆을 지나쳤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영상의 속도를 5분의 1로 줄여놓은 듯 천천히 움직였다. 하차문 바로 맞은편에 앉은 나는 빨려들듯 할머니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랐다. 버스 안의 누구도 할머니를 도와주려 나서지 않았다. 어떤 이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스마트폰에 빠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할머니가 천천히 통로를 걸어 조심히 하차계단을 하나, 그리고 하나, 밟아 내려서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할머니는 천천히 몸을 돌려 버스 안쪽을 향한 후 하차문 손잡이로 중심을 잡고 도로위로 몸을 조심히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숨을 천천히 쉰 후 한발짝 한발짝 버스 옆에서 벗어났다. 우리 모두는 마치 속도를 5분의 1로 줄인 영상속 사람들처럼 조용히 차분하게 할머니를 지켜봤다.


누구도 할머니가 빨리 내리도록 할머니에게 다가가 돕지 않았다. 모든 에너지가 안으로 빨려든 듯 몹시도 작은  체구의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서둘러서 버스에서 내리고 버스의 갈길을 가도록 돕는 그런 도움이 아닌 듯 했다. 할머니가 버스에서 하차하도록 여유를 주는 것. 그 순간 필요했던 것은 할머니의 속도를 인정하는 여유로움인 듯.

우리는 할머니를 돕지 않음으로써 할머니를 도왔다. 긴 기다림에 재촉도 없었다. 무엇보다,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할머니의 담담함에 마음이 좋았다.

 

지구별약수터 홍보를 위해 곽지 해수욕장에 가는 길이다.

지구별약수터 캠페인에 새롭게 합류한 지구별토끼와 함께 곽지 주변의 카페를 돌 예정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8월 중순이 다 되어서야 시작된 문화도시제주의 환경 캠페인.

급해진 마음과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욕심에 하루를 제대로 쉬지 못하고 쫓기듯이 달려온 것 같다.


할머니의 속도를 인정하듯 나의 속도도 인정하는 것.

할머니 스스로 자신의 속도를 인정하고 담담히 나아갔듯 우리도 각자의 속도를 인정하고 그 속도에 맞게 살아가면 어떨까.

우리가 할머니의 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했듯 우리의 속도 역시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의 속도가 나와 다를 때 그를 도와 나의 속도에 맞추기 보다 그의 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해 준다면.

성장 만이 미덕인 듯한 우리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꼭 성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이 마를 때 주변의 지구별약수터를 찾아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