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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Sep 11. 2023

우아한 악당이 되리라

 2015년 1월에 시작해 8년 동안 운영한 교습소 문을 닫았다. 임대인에게 계약을 종료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더니 통보일 이후 3개월 동안 임대료를 송금하면 보증금을 반환하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통장으로만 왕래한사이라 그런지 이별에도 감정은 없고 숫자와 계산만 차갑게 남겨졌다. 딱 그만큼의 인연이었다. 상가를 매개로 맺어진, 서로의 필요를 교환하는 것으로만 이어져 있는 사이. 계약서에 기입된 약속들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만날 일이 없고 만날 일이 없어야 서로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관계였다. 그러니 숫자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고 그런 관계 위에 8년이란 시간 따윈 아무 힘도 없다. 손때 묻은 문제집들은 모두 버리고 책상, 책장, 에어컨 같은 덩치 큰 물건들 몇은 남겨두었다. 작은 물건들은 상자 하나에 모아 담았다. 창문은 잘 닫혔는지 불을 켜둔 곳은 없는지 살핀 후 문을 닫았다. 마지막 퇴근이었다.     


그날로부터 2개월이 되어갈 무렵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연락이 왔다. 매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교습소에 남겨둔 큰 짐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하고 물으니 새로 들어올 분이 넘겨받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렇게 그 상가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3개월의 임대료 책임에서 마지막 1개월분이 절약되겠구나 싶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섣불리 다행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상가에 새 임차인을 들였으나 약속대로 3개월째의 임대료 송금이 확인될 때까지 보증금을 반환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휴대폰에 찍힌 글자들을 쏘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유인즉 새로 들어올 임차인에 대한 배려로 첫 달 임대료를 받지 않기로 했고 그 선심에 대한 대가를 나더러 치르라는 논리였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껏 하셔야지.      


첫째 그녀의 좋은 사람 놀이에 내 돈이 자본금이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둘째 논리도 없고 양심도 없는 처사를 상식적인 일이라는 듯 당연하게 요구하는 뻔뻔한 태도에 분노했다. 마지막으로 정말 열받는 대목은 내 보증금이 볼모로 잡혀있는 까닭에 마음껏 화를 내기도 난감한 상황이라는 사실이었다. 장문의 문자로 그녀의 요구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세세하게 어필하였으나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끝내 내게 돌아온 것은 마지막 한 달 분의 월세가 뜯겨나가 피를 뚝뚝 흘리며 돌아온 0 하나가 줄어든 보증금이었다.      


화를 잘 내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과거형을 썼다는 것에 주목하시라.) 화가 날 일을 잘 피해 다닌 까닭에 오랫동안 화 낼 일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싫어서 막무가내로 우겨 제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될 바에야 손해를 보더라도 나의 점잖음을 지키며 우아하게 살고자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내가 추구하는 우아함이 만만함으로 해석되었나 보다. 그렇다면 화를 낼 만한 일엔 제대로 화를 낼 줄도 알아야겠다. 표출하지 못한 화는 마음속에 갇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끝내 폭발해 버리고 끓어 넘친 화의 용암은 나를 녹여버릴 기세로 흘러내린다. 정말이지 참으면 병이 나겠다. 스스로를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멋지게 화를 낼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해야겠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상대가 행하는 불의에 놀아나지 않도록 우아한 악당이 되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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