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는 지난주에 퇴사를 했다.
3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나름 청춘을 바친 회사였다. 이 회사에 오기 전 이미 세 곳의 조직을 경험했다, 하지만 여긴 달랐다. 처음으로 직장 내지는 직무를 기준으로 조직을 선택하지 않았고, 함께 사회 문제를 해결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조건들을 단번에 컷! 포기해버린 조직, 바로 나의 첫 '소셜벤처'였다.
퇴사하자마자 찾아온 설 연휴 나흘에 하루를 더 붙여서, 닷새를 쉬었다.
그렇게 소중했던 회사를 나와 헛헛할 법도 한데, 남들도 다 쉬는 명절이라 그런지 그리 남다르지 않았다. 사실 뭐, 퇴사후유증 따위 앓을 새가 없을 수 밖에, 딱 닷새 쉬고 나는 카이스트 사회적기업가 MBA에 입학했다. 나의 첫 소셜벤처와는 이별했지만, 내가 창업하는 첫 소셜벤처를 새로 만나기 위해.
1월 한 달은 내게 무척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한달 내내 여러 사람들과 긴-긴-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마다 아쉬움을 표했고, 종종 그간의 추억과 고마움을 손편지에 써서 나를 환히 웃게 한 동료들이나 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대부분 책이었는데, 인바디가 되는 체중계도 있었...)을 준비해주신 분들도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니, 퇴사한다고 하니까 왜들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거야?'라고 얘기할 정도로 분에 넘치는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운이 정말 좋았다.
지난 3년을 매듭짓는 동시에 새로운 2년을 준비해야 했다. 졸업한 선배들도 전공 교수님들도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분명 그것보다 훨씬 더 빡셀거야!'라고 하도 겁을 주는 바람에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스트에 지원한 이유 중 하나가 한번쯤 나를 극한까지 밀어부쳐서 기초체력을 기르는 것도 있었지만 의지와 다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미리 공부하거나 고민해두면 좋을 것들을 쭉 적어놓고는 하나씩 지워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다. 뭐랄까, 눈 앞에 설산이 있을지 바다가 펼쳐져있는지 모를 만큼 짙은 안개가 사방을 꽉 채운 느낌이었다. 발을 떼기 전에 아이젠을 챙길지 구명복을 챙길지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지 선택을 해야하는데, 도무지 결정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없이 짙은. 그렇게 닷새를 멍-한 상태로 흘려보냈다.
안개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아마 내 앞에 무엇이 나타나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즉,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과 지난 시간 내가 축적해온 경험과 지혜들이 어쩌면 틀렸을지 모른다는 못미더움이 혼합되어 발을 떼지 못했다.
닷새째 되던 날, 기숙사에 들어와 짐을 풀고 지난 달에 선물 받은 여러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을 다시 꺼내 읽었다. 비로소,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한창 젊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막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지요. 그런 까닭에 저는 친애하는 당신에게 온 마음으로 부탁드리고 싶군요. 풀리지 않은 채로 마음속에 담고 있는 모든 의문점들에 대해 인내심을 발휘하시라고, 그리고 그 의문점들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시라고요. 자물쇠로 굳게 잠긴 방들을 사랑하듯이, 그리고 완전히 다른 낯선 언어로 쓰인 책들을 사랑하듯이요. 지금은 그 의문점들에 대한 이런저런 답들을 찾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애써도 해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대답들을 직접 살아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직접 살아 보는 게 중요합니다. 이제부터는 그 질문들과 의문점들을 직접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득히 먼 미래 어느 날,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해답 안으로 한 발 한 발 서서히 들어와 살고 있게 될 겁니다. 또한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 지극히 행복하고 순수한 형태의 삶을 형성하고 펼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를 연마하십시오. 어떤 것을 만나게 되든 깊은 신뢰감을 갖고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오로지 당신의 의지에서 비롯된다면,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 있는 모종의 위기 상황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어떤 것이 되었던 그것을 증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앞에 펼쳐진 '그 무엇'을 아무리 두려워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먹어보지 않고는 그 고운 입자가 소금인지 설탕인지 알 수 없듯이 아무리 열심히 상상해 본다고 해도 나는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할 거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내가 가진 무기들이 한 없이 볼품없어 보이고, 내 앞에 우뚝 선 설산이 끝없이 높아 보여도, 결국 한 걸음을 떼는 것 부터인데 그러려면 떼야만 한다. 그래야 알 수 있다, 진실로 불가능한 일인지.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매우 험난하거나 불가능하겠지만 어쩌면 호재를 만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꽤 운이 좋았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베이스캠프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장비도 저마다 다르다. 산의 높이나 위험도도 달라 요구하는 체력 또는 경험치도 다를 것이다. 다만, 올라보지 않고서는 이게 얼만큼 높고 험한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 누구나 이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도전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이 산에 오르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산에 오를 것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손에 쥐고 가방에 넣은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한 발 한 발 걷다보면 서서히 안개도 걷힐테고, 뒤돌아보면 어떻게 왔는지 길이 보이겠지. 꼭 정상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오르던 길을 반추하며 다음 산은 더 잘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위대함은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오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차곡차곡 하루하루 걸음을 떼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