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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Aug 16. 2018

비온 뒤 맑음

개인전 말고 팀플레이, 미안하단 말은 잠시 넣어둘게요

요즘 내 일상은 퍽 단순하다. 아침 8시쯤 일어나 대충 짐을 챙겨 헬스장으로 간다. 30분 좀 넘게 달리기를 하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10시. 그리고는 몇번의 미팅과 몇십개의 이메일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못차리다 화르르 깨면 어느새 7시가 넘어있고 사무실에 남아 낮에 못한 이메일 회신이나 피드백, 몇가지 중요하고 급한 일을 쳐내고 11시, 어느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빨래를 돌리거나 청소를 하고, 샤워하다 생각난 몇가지 또 중요하고 급한 일을 메모하거나 빨리 처리하면 12시, 마사지 공을 발바닥으로 문지르며 책을 좀 읽다가 피곤에 쩐 하품을 두어번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피곤했는데도 누우면 바로 잠이 드는게 아니라 곱셈을 한다거나 여기저기로 점프하는 일의 소용돌이 속에 또다시 한참을 머물렀다가 비로소 잠이 든다. 그리고 꿈에서도 곱셈이나 뺄셈(그러니까 돈 계산) 같은 걸 한다, 다 틀리는 주제에. 


불쌍 또는 대단해 보이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요즘 나는 내 일상을 최대한 단순화하고 있다. 예측 또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인데 내가 요즘 맞닥뜨리는 대부분의 일은 예측과 통제와는 거리가 멀다. 며칠전 티타임 중에 누군가 “일이 잘 풀리고 해피할 때는 아무도 나를 안찾다가 문제가 생기고 해결사가 필요할 때만 대표를 찾는다”고 말했는데, 백퍼센트 공감한다. 대표의 역할 중 팔할은 문제해결사이자 의사결정자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매일 그 일을 해도 매번 그놈의 ‘일’이 생길때마다 어려움을 느낀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물론,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다). 


'일' 이란건 느닷없이 심지어는 최고 바쁠 때 아싸! 이때다 하고 터진다


최근 중요한 의사결정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더 많아지면서 나에 대한 통제력이 취약해졌다. 달리기를 하면서 최대한 해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씨로 남아있는 불안과 예민이 자주 폭발한다. 특히, 중요한 사람일수록, 믿고 의지할 수록 퉁명스러움은 배가 되고. 물론, 디테일에 집착하고 바를 높이 유지하는 것은 Rule No. 1이지만 불만족함을 언행으로 표현할 때 그 취약성이 마구 뿜어져 나온다.


오늘도 그 예측과 통제불가능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사실 나는 거의 취약의 끝에 다다랐다. 휴일에도 출근한 팀원들을 얼른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절망스러웠다. 대표이자 PM으로서 품질과 시간관리에 실패한 점,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실패한 점,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한 점 등등. 대표 자격 고시같은게 있었다면 보나마나 낙방했을 점수였다.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워 사과하는 내게 팀원들은 ‘우리는 한 팀이니 사과하지 말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지금 개인전에 출전한게 아니었다, 팀플레이고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여러명이 모여 힘을 합치고 있었다. 물론 리더로서 내 책임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나는 고시에 또 떨어졌다. 그간 팀원들의 노력, 인내, 열정의 값을 제대로 매기고 있지 않았으니까.


사실 요즘 팀원이 늘고 피드백하고 논의하고 디벨롭할 일이 많아질수록 어떤 무게에 짓눌린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텐데, 전제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오늘 깨달은 거다.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지금 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했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책임지는 것은 보다 일하기 좋은 환경과 동료를 계속 만들어주는 일이지, 그들의 헌신과 열정 자체를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이다. 동료들을 얕본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했다, 내 실수다. 사과하지 말라는 말에 아무 답도 못했지만, 미안하면서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그리고 가난했던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미안하드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일도 분명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사고가 터질 것이다. 일은 늘 벌이고 해결하고 거기서 배워서 더 큰 걸 벌이고 해결하는 것의 연속이니까. 그때는 오늘보다 조금 더 기꺼이 받아들이길. 물론 사람은 안변하니까, 통제못하고 예측못하는 일을 최소화하고자 하겠지만 조금 덜 썽질내기를.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업을 했는데, 내 문제를 더 많이 발견, 해결하고 있다. 감사할 일인지, 원.



+ 덧. 글을 쓰는 사이, 빨래가 끝났다. 다시 루틴으로 돌아와 책 몇페이지 읽으며 마사지공으로 발을 문지르고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8시에 일어나 달리기를 한 다음 출근해 연이은 미팅으로 녹초가 되겠지. 그래도 내일은 티타임을 빙자한 미팅 보다는 일 얘기 한마디도 안하는 티타임을 10분이라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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