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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Mar 10. 2024

아이 셋, 커리어 우먼, 이혼 경험 무

후배와의 대화


 아주 오랜만에 카톡으로 연락해 온 후배 연지(가명)와 드디어 통화를 했다. 출장과 시차까지 더해지니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2주를 넘게 지체했다. 


 종종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국 후배들의 연락을 받는다. 소식이 몇 년 간 뜸하다가 '얘기하고 싶어요!'가 날아오는 경우는 오랜 고민의 끝일 때가 많다. 고민의 내용이 깊은 건 물론이고,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나에게 문자를 보내기까지 또 몇 차례의 망설임이 있었을 테다.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을 낸다.


 연지의 고민은 이러했다.

 결혼한 지 N 년 차. 예쁜 딸은 벌써 5살이 되었다. 현재 매우 훌륭한 글로벌 기업의 한국 오피스에 수년간 근무하면서 다양한 직군을 경험하고 있다. 문제는 다음 단계로의 성장 플랜. 

 대규모 글로벌 기업에서 한국 지사장 정도의 포지션에 오르려면 해외 근무 경험이 종종 요구된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 해외 근무에 도전하자니 남편과 아이가 걸린다. 게다가 아이가 곧 손이 많이 간다는 학령기에 접어든다. 요약하자면 - '외국에서 일해보고는 싶은데, 남편과 아이까지 동원되는 큰 도전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보상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고민을 하는 와중에 몇 명의 선배들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해외 경험도 있고 회사에서 잘 성장 중인 한 기혼 여자 선배를 만났는데 그녀는 아이가 없었다. 또 다른 선배는 해외 경험도 있고, 회사에서도 잘 나가고, 아이도 있는데, 남자다. 그의 아내는 전업 주부.

 그래서 본인의 상황을 더 깊이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하다가 내가 떠올랐다고 한다. 세 아이의 엄마. 24년 차 커리어 유지 중. 이혼 경험 무. 본의 아니게 얻어걸린 상담의 자격이 재미있어서 푸훗! 하다가 후배의 결연한 얼굴을 보고 진지함을 되찾았다. 그래, 언니가 도와줄게. 컴온. 




 

 1. 해외 근무 경험이 꼭 필요한가요?

 정답은 케바케. (Case by case) 본인의 목표에 따라 다르다. 모두가 해외에서 일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연지가 글로벌 대기업의 한국 지사장, 또는 아시아 지역 대표가 되고자 한다면 해외 근무를 추천한다. 한국-only의 커리어는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다. K-culture의 인기가 오르면서 한국 근무를 원하는 외국인들의 수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진다는 의미다. 

 각국 지사의 리더십 포지션을 결정할 때 다국적 기업이 고려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일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영어를 잘 구사하는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리더십 포지션은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WHAT에 해당), 해당 기업의 문화와 가치, 윤리 기준에 맞게 일하는 것 (HOW에 해당)도 매우 중요하다. 단기적 성과를 쫓다가 기업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질 때 닥치는 위기의 규모를 생각하면 HOW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해외 근무 경험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영어 실력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사고의 유연성을 키웠는가, 다양한 가치관을 관통하는 높은 윤리적 기준으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가를 본다. 여기에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2. 어떻게 경력을 멈추지 않고 세 아이를 키울 수 있었나요?

 그건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다. 뭔가 더 그럴듯하고 멋진 인생의 지혜를 기대했다면 너무 미안하다. 그런데 이게 나의 진실이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해내고 계신다. 그런데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의 커리어를 꾸준히 '성장'시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 아이를 키우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고비의 순간마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엄마에게 포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연지에게 예를 들어주었다.

 상황: 한국과 네덜란드에 사는 두 엄마가 있다. 한국 엄마 이름은 연지, 네덜란드 엄마는 머라이. 

 아이가 학교에서 발표회를 한다. 졸업식도 아니고, 생일도 아니고, 아이가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조그만 행사이지만 아이는 엄마가 와 주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하필 그날 회사에 엄청나게 중요한 회의가 있다. 

 결정: 연지와 머라이 모두 고민 끝에 하루 전 회의에 불참을 선언했다. 두 엄마 모두 상사의 동의를 받았다. 


 연지의 상황: 모두가 연지의 행동에 놀란다. 상사의 아량을 칭송한다. 연지에게 복 받았다며 상사에게 감사해하고 더 잘하라고 격려한다. 연지는 마음이 무겁다. 회사 사람들은 연지의 이야기를 두고두고 회자하며 연지는 왠지 민폐의 캐릭터가, 연지의 상사는 신(god)의 존재가 되어 간다. 연지는 회사에서 입지가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아이는 크면서 아프기도 할 거고, 평일에 입학식, 졸업식, 각종 학교 행사가 수 없이 있을 거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한다. 


 머라이의 상황: 모두가 머라이의 행동에 놀란다. (왜 진작 말하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 머라이의 용기와 결단을 칭찬한다. 상사는 가족이 일보다 먼저라면서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한다. 머라이는 아이의 행사 사진을 공유하고 상사와 팀원 모두 아이를 축하해 준다. 회의 결과가 이메일로 공유된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 13년, 싱가포르에서 3년 반, 네덜란드에서 9년째 조직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세 아이를 성인으로 키워내면서 보고 겪었다. 내가 연지였고, 머라이였고, 그들의 상사였다.

 한국의 조직에서는 희생이 미화된다. 휴가를 반납하고, 아픈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야근을 반복하면 사회생활에 진심인 사람이 된다. 승진한다. 

 네덜란드에서 휴가를 반납하고 아픈 아이를 직접 돌보지 않고 야근을 반복하면 상담을 권유받는다. 왜 그러십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회사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그리고 해당 직원의 상사도 상담받는다. 팀의 인원 대비 업무가 과중한 것은 아닌지, 상사가 강압적인 것은 아닌지, 해당 직원의 행동이 자칫 '회사의 기대'로 비치지 않도록 상사가 잘 대처하고 있는지. 네덜란드 상황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므로 조심스럽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그러하다.  


 다시 연지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 내가 아이 셋을 키우면서 회사의 리더로 성장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환경을 바꿨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마음 편히 회사를 다닐 있는 환경에서는 누구나 아이와 커리어를 함께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 누구나.


3.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의 순간에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도리가 없다.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나는 연지에게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는 '앞이 더 깜깜한' 쪽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그곳에 더 큰 보상이 있을 거라고 했다. 견뎌내기만 하면. 

 연지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정 반대의 조언을 한다고 했다.


 돌아보면 크고 작은 결정의 순간에 늘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려고 하면 나서서 뜯어말리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다. 가족, 가까운 친구, 선후배들. 나를 걱정하고 위해주는 사람들이 나를 가장 말렸다. 고생길이 훤하다고. 주어진 환경에서 안락하게 살라고. 그들도 가 보지 않은 길이기에 걱정과 염려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예전의 다른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나에겐 '조언자'의 원칙이 있다. 조언해 주는 마음에 감사하되, 이런 사람의 말만 믿고 따른다. 

 1. 나를 잘 아는 사람일 것.

 2. 해당 영역을 경험해 본 사람일 것. 

 3. 나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일 것. 


최근에 읽은 애덤 그랜트의 "히든 포텐셜 Hidden Potential"에 똑같은 내용이 나와서 놀랍고 즐거웠다. 





이제 선택은 연지의 몫이다. 

응!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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