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대단한 그녀의 꾸준함과 성실함 외에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녀가 스포츠국 아나운서로 일하던 초창기에 들은 담당 PD의 말이었다. "너는 아나운서로서 뭔가 2%가 부족해."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던져진 이 말에 이재은 아나운서는 상처를 받았고 한 동안 '나는 모든 일에 부족하고 뭘 해도 안될 사람'이라는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꾸준함을 알아보고 응원해 준 사람들이 생겼고 지금 이렇게 제 몫을 근사하게 해내는 아나운서가 되었다. (무려 9시 뉴스데스크의 앵커가 아니던가.)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못된 PD 같은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까마득한 대학 선배이자 회사의 간부였던 남자 선배가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니? 내가 봤을 때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했을 때. 종종 함께 야근하며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선배가 뜬금없이 "너는 조직의 우두머리감은 아니야. 여기서 너무 애쓰지 말고 적당한 대행사 같은 곳으로 옮기는 건 어때."라며 청하지도 않은 인생 조언을 했을 때 나는 상처 입고 좌절했었다.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던지는 말 때문이었는지, 그냥저냥 생겨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20대-30대 시절, 나는 동료들보다 오래 일하는 편이었다. 자료 한 장에도 삽질을 반복하면서 다듬고 또 다듬느라 남들 다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남을 때가 많았다. 사용하던 노트북이 멈춰서 회사 IT실에 들고 갔더니 담당자가 그랬다. "아휴, 이거 지급한 지 2년이 채 안된 노트북인데, 상태는 5년도 넘게 쓴 것 같네요."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해온 나 자신을 다독여 주었을 법도 한데,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나는 남들만큼 머리가 좋지 않으니, 남보다 더 오래, 더 많이 일해야 해."
자격지심에 빠질 기회는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왔다.
네덜란드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스트리아에 있는 연구소에 갔었다. 본사에 새로운 디렉터가 왔다며 환영 디너가 열렸고, 나와 비슷한 직급의 유럽인들 십여 명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내 순서를 마치자 누군가가 물었다. "어느 MBA 출신이야?" "...??" 나는 MBA를 하지 않았다.
얼마 전, 회사 사업부의 대표들 몇몇이 모여서 후임자 지정을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는 임원 자리에 지금 당장 대체 가능한 사람과 향후 1~2년 내에 후보가 될 사람들을 지정해서 관리한다. 소위 'Top Talent 최고 인재'라고 칭해지는 이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임원들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동료인 아르멧 (Armet, 가명)이 말했다. "지사에서 뽑아온 사람들은 현장 실무에는 밝을지 몰라도 회사의 전략 방향을 정하는 자리에는 역부족이야. 리더 자리에는 아무래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하지." 한국의 지사에서 '올라온' 나로선 참 듣기 불편한 말이었다.
이젠 나이도 좀 먹고 경험도 쌓였지만, 이렇게 훅 들어오는 말들에 여전히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런 상처들이 나를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잘 모르고 부족하니까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이재은 아나운서는 매일 9개의 일간지를 읽는다는데, 나는 십 년 넘게 Harvard Business Review를 매달 받아서 읽고 있다. 그동안 배송지가 한국에서 싱가포르, 그리고 네덜란드로 바뀌었다. 유명한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나 성공한 기업가들의 책들도 꽤 많이 읽었다. 지금은 골드만삭스 출신이자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Robert E. Rubin)의 The Yellow Pad를 읽고 있다. 좋은 의사 결정을 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다.
회사에서 성장하는 단계마다 WTF 영역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WTF = What The F..., 도대체 어떻게 할지 감도 안 잡히고 실수라도 하면 나락으로 갈 것 같은 끔찍한 일들) 그때마다나보다 잘 나가는 동료나 선배들을 붙들든, 맥킨지 McKinsey 리포트에 파묻히든, 해당 주제의 책을 왕창 주문해서 보든, 항상 덤벼서 배웠다. 어떤 일은 금방 따라잡고, 어떤 일은 3개월이 걸리고, 어떤 일은 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내가 어디에서 시작했었는지를 돌아보면 그동안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아무리 애쓴 들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고, 굴욕감, 수치심, 쪽팔림은 이제 뭐 익숙한 감정이다.
하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기쁨은 정말로 크고 웅장하다. 그리고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가끔 정말 힘든 날에는 '이만하면 됐지. 이제 그만 돌아가서 편히 살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다. '뱀의 머리보다는 용의 꼬리가 되길 잘했어.'. 나는 처음부터 주목받는 역할이나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 중 일부와 나란히 있게 있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를 배움의 원동력으로 삼아 성장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즐겁다.
이재은 아나운서의 성실함과 꾸준함은 나랑은 무척 다르다. 나는 여전히 루틴이 힘들고, 미친 듯이 일을 몰아서 하거나 한없이 늘어져서 주말 내내 침대 안에 묻혀있곤 한다. 하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배우는 일을 긴 여정으로 삼아 포기하지 않고 해 나가는 점은 감히 그녀와 나의 공통점이 아닐까. '이재은 님, 영감을 주어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