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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27. 2019

과속 금지

진짜 보물을 놓치게 될 거야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데 2년 전 수술한 왼쪽 유방에 통증이 느껴졌다. 유방 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욱신거려서 자동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찌릿한 통증이 두더지게임 속 두더지처럼 여기서 한 번, 바로 옆에서 한 번, 다시 저쪽에서 한 번 일어났다. 수술 부위에 손을 대어 보지만 딱딱한 수술 흔적만 만져진다. 의사에게 그 부위가 아프다고 하면 그건 외과 수술을 했으니 자연스러운 증상이지 재발과는 상관이 없다는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암 경험자인 나는 통증 때문에 수술 부위를 매만질 때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의 끝자락이 저절로 눈 앞에 펼쳐지고 속수무책으로 빛이 닫히려는 공간에 던져지곤 한다.    

 

그렇게 빛과 어둠의 경계에 멍하니 서 있다 퇴근하는 날은 발걸음이 무겁다. 무력하게 시간만 보낸 것 같은 죄책감이 몸 아래 짙게 깔린 탓이다. <체공녀 강주룡>에서 주룡이 말한 “이만하면 오늘도 떳떳하다”를 따라 외쳐보지만 위안이 안 된다. 미완성 투성인 것 같은 내 삶이 답답해 조급증이 도지는 순간이다. 무언가 이루어야 하는데 하나도 마무리된 것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집으로 간다. ‘해치우는 태도’로 가족들과의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내일 일찍 출근해서 오늘 다하지 못한 일들을 하리라는 초조한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나의 죽음을 이유로 사람들이 모이는 행위를 ‘장례’라고 한다면 나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은 찾아오는 모든 이의 감정이 존중됐으면 한다. 숨결이 빠져나간 나의 육체가 떠나기 아쉬워서 며칠 더 머무는 동안, 나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화내고 원망도 하며 각자의 감정에 맞춰 나와 이별하기를 바란다. 우는 사람에게 그만 울라는 말 대신 곁을 지키고, 웃는 이에게는 같이 좀 웃자고 말 붙이면 어떨까 싶다. 내가 죽기 전까지 듣던 ‘즐겨찾기’폴더에 담긴 노래들이 공간에 흐르고 커피와 차, 디저트를 즐기며 내 이야기들을 쏟아내면 좋겠다.      


공간 한켠에 나의 작업실 사진을 걸어놓으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곳이자 하고자 했던 일을 하기 위해 머물던 공간이니 나와 관련된 것들로 꽉 차 있다. 내가 키우는 테이블야자와 홍콩야자, 매달아 놓은 수염틸란드시아, 오렌지빛 스탠드, 로스팅된 커피콩과 하리오 드립퍼, 뭉텅이로 꽂혀있는 길쭉한 연필들과 연필깎이, 나무 보드와 쌓인 인쇄물들이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책상 앞에 붙어있는 메모들을 보며 날려 쓴 글씨에 대해 한마디씩 하겠지, 초록색 형광펜으로 그려놓은 집 한 채와 그 아래 쓴 “Ann’e’”을 보며 ‘나도 빨강머리 앤 좋아하는데!’ 하는 사람 한 명쯤은 있을 테고, 딸 선우의 그림과 그가 직접 만든 작품들이 책상 앞에 놓인 모습을 보며 선우를 자주 생각했나보다고 짐작하겠지. 특히 선우가 그렇게 알아주면 좋겠다. 예측하기 어려운 물건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들을 나눠봐도 재밌겠다.      


내가 쓴 글들을 읽으며 나와의 대화를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겠다. 글에는 내가 한 일, 내가 생각한 것들이 담겼다. 시간을 통과하며 생성되고 자라고 변화해갔던 것들이 촘촘히 박혔다. 글을 통해 본 나와 직접 겪은 나와의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하며, 언행‘불’일치의 삶이라 뒷담화를 늘어놓아도 그날만은 참겠다. 내 글을 읽은 엄마의 마지막 감정이 ‘글 쓰고 나서 후련했겠구나’였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좋은 글 쓰고 싶어서 잘 살고 싶었고, 그래서 직면하는 태도로 살았던 경험담들이다. 나의 공간과 글을 매개로 모인 이들이 마음을 털어낸 후 들어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으로 장례식장을 나서면 나는 웃을 수 있겠다.                




나의 장례식장에서 둥둥 떠다닐 이야깃거리가 생각보다 풍성한 것 같아서 안심이다. 내가 삶에서 이루고자 했던 바가 내 주머니에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데에 있는 게 아닐까 나에게 되묻는다. 그사이 동동 구르던 발도 잠잠해졌고 해야 할 일들로 빼곡했던 머릿속에 ‘커피와 케이크’가 덩그러니 놓인 걸 보면 꽤 그럴 듯한 답이다.



나에게 ‘이루다’는 ‘채우다’이고, 물음표였던 ‘무엇’은 ‘이야기’이다


‘이룬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남에게 번듯하게 내세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막연하고 익숙한 말에 갇혔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면서 ‘무언가’와 ‘이루다’에 대한 성찰 없이 강박감에만 시달렸다. ‘지금의 나’는 미약하니 무언가를 해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전제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타인에게 평가받는 순간은 익숙하다. 시험 성적, 옷차림, 몸매, 학교 이름과 회사 이름, 노력의 정도, 경제적 수준, 선택하는 태도와 방식, 양육 방식 등등. 그래도 내 인생을 통째로 평가받을 심산이었다니 아찔하다. 가끔 다짐했던 ‘내 속도대로 살기’를 다시 마음에 새긴다.

 

“엄마 지금이야 지금!” 하는 아이의 부름에 미적미적 발걸음을 옮겼던 어제를 반성한다. 오늘 저녁에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왜왜왜” 하고 응답해야지. 아마도 어제부터 맹연습 중인 휘파람 소리를 들려주려고 나를 부를 텐데, 스무 번 가까이 ‘휘휘휘’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오므린 입에 집중하는 아이를 끝까지 지켜보겠다. 내 속도보다 빠르게 가려고 하면 ‘선우의 휘파람’처럼 오래오래 반복해서 떠올리고 싶은 이야깃거리들을 놓친다. 과속,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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