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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02. 2018

나는 아빠를 잘 모른다

서른여섯, 예순 셋의 아빠가 궁금해졌다

보름 전 나는 빈소도 차려지지 않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두시간 만이었다. 일요일 저녁 8시, 서울 청량리에 위치한 병원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나와 남편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이 될 1호실 입구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남편이 화장실 간 사이 주차장 쪽에서 한사람이 걸어왔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기에 형광색이 섞인 화려한 운동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얼굴로 시선이 옮겨졌다. 죽은 자를 만나러 온 잔뜩 가라앉은 표정의 오륙십대 남자, 코 끝에 내려 쓴 안경과 색색의 운동화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눈길을 거두려던 찰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몸이 굳었다. ‘아빠인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가 ‘내가 왜?’ 같은 오기가 생겼다. 지금 느끼는 긴장감은 몸이 기억하는 과거의 두려움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실제로 그 사람이 아빠일지라도 나는 내 삶을 내 힘으로 꾸려가는 성인이니까 무서워할 것 없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긴 다리가 필요했다. 다리를 세울 에너지가 필요했고 그 힘으로 불쑥 올라오는 몸의 두려움을 소화시켜야했다. 걸어가는 그 사람을 내 두 눈으로 쫓으면서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사무실로 방향을 꺾었고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남편이 돌아왔다.  “아빠인 것 같아. 사무실로 갔어. 아닐 수도 있어. 근데 맞는 것 같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보고 14년 만이다.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아서 늙지 않을 줄 알았는데 코 끝까지 내려 쓴 안경이라니, 세월에 장사 없다는 낡은 말이 새 것처럼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당신이 죽으면 큰아들도 불러달라고 하신 터라 장례식장에서 마주칠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까만 노인일 줄은 몰랐다. 그 사이 사무실에 갔던 아빠로 추정되는 그 사람이 1호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맞구나.  


아빠와 딸로 마주칠 순간이 두려웠다. 심장이 다시 뛰었다. 종이인형이 된 것처럼 온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집에 가고 싶어” 내 말을 듣자마자 남편은 일어섰고 순식간에 마음이 바뀐 나는 다시 그를 앉혔다. “아니야. 가기 싫어. 내가 왜 가.”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남편은 집에 가도 된다고, 네가 편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조금 더 견뎌 보기로 했다.  




기억 속의 아빠


아빠는 내가 열한 살 때 전세보증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월세집을 구해 이사했고 이후아빠의 외박이 잦았다. 부부 싸움 횟수가 늘었고 일년여 뒤 아빠는 옷을 챙겨 집을 나갔다. 아빠가 서랍에서 옷을 꺼내 가방에 담는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아빠도 나도 말이 없었다. 아빠의 마음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빠를 붙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 가는 아빠를 붙잡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자라는 내내 괴로웠다.  


이후 느닷없는 몇 번의 방문과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과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본 게 아빠와 딸로서 만난 전부였다. 그때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에게 인사하듯 ‘안녕하세요’ 했다. 그리고 잘 지냈느냐, 별 일 없었느냐 묻는 아빠 말에 ‘네’만 되풀이했다. 아빠에게 성적표를 내민 적 없고 배고프다며 맛있는 것 사달라고 졸라본 적도 없다. 문제집값을 달라거나 독서실비 내야 한다는 말 한번 해본 적 없다. 딱 한 번 나의 어려움에 대해 아빠에게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아빠가 집을 나간 후 월세가 벅찼던 엄마는 어느 골목 안 지하의 집을 구했다. 하교 후 작은 대문을 열면 커다란 쥐가 잽싸게 꼬리를 감추며 숨는 통에 집이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열발자국을 걸어 현관까지 가야하는데 그 길이 너무 무섭다며 아빠 앞에서 울었다. 열세 살이었다. 대답이 신통치 않아서였을까, 아빠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는 죽지 않았고 엄마와 이혼한 것도 아니라 아빠의 부재를 딱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잠시 떨어져 살아보기로 서로 합의한 것도 아니어서 별거라는 말도 어색했다. 간신히 찾은 말은 ‘없다’였다. 아빠가 집을 나간 것, 그러니까 나를 두고 나를 걱정하지 않고 나를 상관하지 않은 채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아빠는 없다’는 결과로만 덮어버렸다.  



‘내 곁에 없는 아빠’라는 규정이 적절했던 것 마냥 기억 속의 아빠 표정은 희미했고 목소리조차 없었다. 작아서 들리지 않다기보다 도통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가깝다. 반면 아빠가 들고 온 와이셔츠가 담긴 백화점 쇼핑백과 물청색의 고급 승용차, 아빠가 사준 연보라색 백화점 머플러, 아빠가 데리고 갔던 워커힐 피자집은 선명하다. 아빠는 십원 있으면 이십원 쓰려는 사람이라는 엄마의 말도 또렷하다.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희미한 기억 말고, 엄마가 해석한 아빠 말고 내가 경험한 아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딸 앞에서 옷을 챙겨 집을 나갈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밖에서 밤을 보내며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세보증금으로 시작한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불안했을까? 동생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고 보증을 서지 않겠다고 했을 때 화가 났던 이유는 뭘까? 왜 엄마와 형제들에게 실패의 화살을 돌렸을까? 왜,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궁금하긴 했을까?  


오랫동안 내게 부재했던 아빠가 바로 앞 1호실 안에 있다. 아빠가 나에게 인사를 하면, 말을 걸면 어떻게 하지? 정답을 찾으려는데 머릿속에서는 ‘모르겠다’만 되풀이한다. 직면하기로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에라 모르겠다 정신으로 일어나 1호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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