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옷이 더 날씬하게 보일까?
날씨가 더워지자 밝은 색 청바지가 입고 싶었다. 낯설지 않은 오래된 욕구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나의 ‘굵은’ 허벅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바지의 색깔은 이미 정해져 있기라도 한듯 진한 파랑이나 검정을 고집해왔다. 어쩌다 마음이 동해서 베이지색 바지를 산 적도 있지만 긴 티셔츠로 허벅지를 가린 후에야 집밖으로 나섰고 한 두번 입곤 헌옷수거함에 던져버렸다.
마침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연청색 바지를 발견했다. 하얀색에 파랑색을 약간 섞은 것처럼 밝은 하늘색이었다. 탈의실로 들어가 바지를 갈아입고 거울을 보았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진한 청바지를 입었던 조금 전보다 1.5배는 더 부푼 것 같은 허벅지에 시선이 고정됐다. 나의 ‘단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바지를 꼭 입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물음표 하나가 똑똑 노크를 했다. “누구를 위해 너의 허벅지는 가늘어야 하지?”
또래 중에서 키가 큰 편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살이 붙기 시작했는데 주로 엉덩이와 다리에 집중되었다. 5학년 때 반바지를 입은 내게 한 친구는 ‘무다리’라고 놀렸고 그 이후부터 다리 굵기에 신경이 쓰였다. 여름이니까 반바지를 입긴 입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얼굴이 아니라 다리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체형은 그대로 굳어졌고 중고등학생일 때는 때마침 통 넓은 힙합바지가 유행이어서 그런대로 다리를 숨길 수 있었다.
이십대가 되자 이런 저런 다양한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 쇄골이 남들보다 더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가녀려 보이기까지 하다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쇄골에 물이 고일 것 같다며 ‘상체는 말랐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팔도 가는 편이었던 나는 그때부터 나를 하체비만의 대표주자로 포지셔닝했다. 친구들과 다이어트니 뱃살이니 하며 몸매 이야기를 할 때 ‘하비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니?’라며 나 스스로 내 몸을 심사위원들 앞에 올려놓았다. 내가 먼저 나서서 내 몸을 비하했다. 마치 잘못된 몸을 소유하기라도 한듯 내 죄를 발빠르게 고하는 태도였다.
내 몸의 ‘단점’을 나 스스로 밝힌다고 해서 콤플렉스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름 내내 긴 바지를 입고 다녔다. 다리에 쫙 밀착되는 스키니를 입고 다니며 굵은 다리를 잘 감추고 다니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상의는 민소매나 네크라인이 많이 파인 옷을 입고 다리는 빈틈없이 감추었다. 누군가 ‘안 덥니?’라고 물으면 원래부터 더위를 안 타는 체질인 것 마냥 ‘전혀’라고 답하며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휴지로 몰래 닦았다. 허벅지가 굵긴 하지만 몸매 전체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라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단점’은 감추고 ‘장점’은 드러내며 고군분투했다.
내 몸이 잘못했다. 날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 허벅지뿐만 아니라 엉덩이는 동대문만큼 펑퍼짐했고, ‘여자 발’이 250mm나 되었고, 손가락은 굵직하고 손바닥은 두툼했다. 얼굴은 ‘화장하면 참 예쁜 얼굴’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머리카락은 안으로 쏙 말리는 반곱슬이라 파마값은 안 들겠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우리는 거울을 볼 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지 않는다. 대신, 몇 년간에 걸쳐 주입된 문화,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들은 말, 그리고 내적인 고민에 의해 형성된 모습을 본다.(<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27쪽)”
어릴 적부터 수많은 외모 품평을 들으며 내 몸은 평가받는 사물이라는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내면화했다. 내 몸을 타인이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심사평에 귀 기울였다. “운동 좀 해라” 누군가 근육 없이 말랑한 내 다리를 보고 말했다. 날씬하지는 못할 망정 운동하는 노력의 표시라도 하라는 말로 들렸다. 외모 품평도 모자라 태도까지 도마 위에 올려졌다. 내면화가 얼마나 깊은지 그런 순간에도 나는 나를 탓했다. ‘그래 살은 못 빼도 운동해서 근육을 만들 수는 있잖아. 탄탄해 보이게. 게을러 게을러.’라고. 소주 광고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처럼 매끈한 다리는커녕, ‘꿀벅지’도 아니고, 그냥 두툼한 고깃덩어리인 내 허벅지는 오랫동안 나의 ‘흠’이었다.
내 몸이 관상용이라는 사고방식은 딸을 키우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화를 보면서 “엄마 쟤는 너무 뚱뚱해”라고 말하는 딸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뚱뚱한 게 뭐야?”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딸도 언젠가 자신의 몸 어딘가를 ‘흠’이라고 탓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건 불행아니던가. 딸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면 좋겠다. 나처럼 콤플렉스에 질질 끌려다니며 자신의 일부를 숨기거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자기 몸을 대상화하지 않았으면 싶다. ‘날씬함’이라는 기준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서 가늘지 않은 부분은 ‘단점’으로, 말라 보이는 부분은 ‘장점’으로 인식하지 않기를, 백설공주에 등장한 왕비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는 장면에서 ‘예쁨’을 당연한 기준으로 삼지 않기를, 또, 또…….
나는 그 연청색 바지를 샀다. ‘보이는 몸’에만 묶인 낡고 수동적이었던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첫 시도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며칠 전에 사둔 형광핑크색 반팔티와 같이 입어보았다. 여름 느낌이 물씬 났다. 며칠 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그대로 입고 나갔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날씨라 엉덩이를 덮는 린넨 자켓을 걸쳐야 한다는 명분 아래 팽팽하고 두툼한 허벅지를 살짝 감추며 움츠러들기도 했지만, 그때의 외출은 며칠 뒤 자켓 없이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보폭이 큰 편인데 그날은 얼마나 더 크게 걸을 수 있나 테스트하듯 더 시원시원하게 걸었다. ‘나는~ 내 허벅지로~ 이렇게 힘차게 걸을 수 있다!’ 폭염 전까지 두 달 내내 즐겨 입는 동안 옷을 고르는 기준이 하나 늘었다.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