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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4시간전

김미월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절묘한 장면 묘사로 환기시키는 우여곡절의 시간과 공간...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 시간」

  “... 진짜 개똥도 개똥처럼 쉽게 생각하지 못해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오만 가지 의미를 부여하다가 번번이 때를 놓치고마는, 인생의 반은 한 일에 대한 후회요 나머지 반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회한으로 보내는 나로서는 그녀가 부러울 따름이다.” (p.11) 열아홉 살에 만난 양희와 나는 이십 년 지기 친구다. 양희는 ‘홀연히 사직서를 내고 여행을 떠나는 것’을 특기이자 취미로 삼고 있는데 그런 양희를 향한 부러움을 투영하는 위의 문장이 눈에 잘 띈다. “... 이제껏 그녀는 자발적으로 혼자였다. 혼자 하는 여행을 선호했고 혼자 사는 삶을 즐겨왔다. 그런데 별안간 혼자라는 사실이 지긋지긋해다. 그녀는 무례한 외판원처럼 함부로 쳐들어온 그 감정을 어쩌지 못해 사진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가다가 돌아온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혼자 간 곳이 가장 아름다울 수는 없었을 테니까.” (pp.27~28) 하지만 그 부러움의 방향에 서 있는 양희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도달하기 세 시간 전쯤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 지구 종말이 현실로 다가왔건만 나는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하러 가기는커녕,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황도 통조림을 먹기 위해 깡통 따개를 찾아 온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통조림을 노려보았다. 현재 깡통 따개 없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오기인지 객기인지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52) 그러니까 혜성과의 충돌이 예견된 지구에서의 마지막 하루에 대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깡통 따개가 없을 때 나는 과도와 망치를 이용하고는 했는데... SF 소설인 것은 아니고 마지막 순간의 반전까지 등장하는 꽁트에 가깝다고나 할까.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남자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얼굴로 이거 최신형 5단 우산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희수가 확인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우산을 받아서 펼쳤다. 그 바람에 물방울이 얼굴에 튀었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는데, 그 모습이 정말 남자가 기억하는 바로 그 희수라는 것을, 그는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p.77)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만난다. 이 한 장면에 두 사람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주 잘된 장면 묘사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남자가 다니는 회사 바로 근처에 그녀의 회사도 있었다. “...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더 일찍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는 연거푸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차창에 비친 것은 피곤에 전 그의 얼굴뿐이었다.” (p.95) 단어와 어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딱 맞춤인 장면의 묘사를 통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재주를 가진 작가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이 남자의 기분에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이다. 


  「2월 29일」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 조개가 모습을 드러내듯 이윽고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한 번도 슬펐던 적이 없다. 그와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를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다. /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p.127) 철저히 준비를 하여 여행을 하는 나와 그냥 가자, 라는 말과 함께 떠날 수 있는 그가 함께 했던 여행 이야기이다. 공간의 신기루인지 시간의 신기루인지 다툴 수 있겠지만 어쨌든 신기루와 같았던 그 여행 이야기이다.


  「오늘의 운세」

  “잠깐, 혹시 저들도 지금 나처럼 침대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것은 아닐까. 저들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알람을 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정말이었다. 이윽고 세 종류의 알람 소리를 넘어, 먼 곳에서 희미하게 다른 알람 소리가, 곧이어 또다른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개의 알람이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수백 개, 수천수만 개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침이란 알람의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끄지 않는다면 영원히 울릴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알람들의 시간. /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p.154) 쳔명관의 <퇴근>(2014)을 읽었을 때의 끔찍함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소설의 발표년도가 2013년도이니 앞선 작품이네, 내가 늦게 읽었을 뿐.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소설은 아니지만 알람을 끄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사무친다.


  「질문들」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는 학자들이 ‘하나의 바늘 위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는가’ 같은 맹랑한 질문의 답을 찾느라 밤잠을 설치며 격론을 벌였다는데, 반짇고리 속의 바늘도 숨을 죽이고 천국에 있는 천사들도 날개를 접은 채 인간 세상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을 그 밤들을 상상하노라면 나는 괜히 흐뭇해지는 것이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일지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쓸모 있게 만들어줄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면, 그 곡진한 기운들이 모여 결국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시대의 얼굴을 바꾸고 나아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에서부터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 너 휘파람 불 줄 아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런 질문들에 이르기까지.” (p.164) 나는 카페에서 소설을 쓰고, 결혼을 앞둔 오빠에게 보증금을 빼서 빌려줘야 할 형편며, 행인을 붙잡고 질문을 해야 하는 앙케트 조사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선생님, 저예요」

  나비의 날개짓처럼 내가 쏘아올린 거짓말이 짝사랑하던 선생님과 반 친구를 엮어 버렸다.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그렇게 선생님과 반 친구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와 2위를 하게 되었다고 하니, 짐작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에야 선생님에게 편지를 통해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도망가지 않아요」

  마흔 두 살의 완구씨는 운명처럼 ‘도망가지 않아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게 된다. 현수막은 베스트 국제결혼중개소라는 곳에서 건 것이었고, 나는 이제 그곳의 주선으로 신부감을 찾아 결혼과 신혼 여행까지 풀 패키지인 베트남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의 곡진한 몇 박 몇 일의 이야기...


  「연말 특집」

  『“넌 왜 툭하면······” / 아, 잠든 게 아니었다. / “안경을 내 옷에 닦아?” / 선은 누운 자세 그대로 굳었다. / “그 블라우스 비싼 건데.”』 (p.271) 오래전 대학 시절 선은 미경 언니라는 이와 한 집에서 산 적이 있다. 미경 언니의 배려 덕분이었지만 그것을 덕분,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라고 고갯짓 하게 될만큼 미경의 캐릭터가 독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던 어떤 선한 속성이 있다고 보는데, 나는 위의 대화 장면에서 그것을 넌지시 짐작하였다.


  「만 보 걷기」

나는 머빈을 통하여 ‘그림 그리는 여행자’라는 블로그를 운영하였던 아미를 회상한다. 춘천에서 살았을 때 잠시 어울렸던 아미와 나는 춘천 시내를 걸었다. 나는 아미에게 춘천을 소개 받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나의 서울을 벗어난 첫 번째 여행지가 바로 춘천이었네, 그 겨울의 공지천...



김미월 /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 문학동네 / 333쪽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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