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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Dec 17. 2024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그때 그 시절의 왜곡이 유머가 되어버리는 현재라니...

  1988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 앞의 전경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정문 바로 옆의 건물 옥상에서 십여층 아래의 전경들을 향해 돌을 던진 적도 있다. 까마득한 아래의 전경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일은 마치 의사 살인행위와 다름 없는 것 같았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그렇게 돌을 던지는 옥상 위의 우리들이 미워 건물을 봉쇄라도 한다면 이 어린 나이에 옥쇄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겁이 덜컥 났다. (사실 난 도저히 그 벽돌을 던질 용기가 나지 않아, 선배가 건넨 벽돌을 양심적으로 딱 잘라서 반 토막 내어, 던졌다. 믿거나말거나...)

  하지만 불붙은 화염병과 뿌연 최루가스, 함성 소리와 페퍼포그의 지랄탄 터지는 소리로 고조될 대로 고조된 양측의 긴장감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정문 앞은 데모가 끝나고 전경들이 물러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를 되찾았다. 깨진 유리조각과 대기중의 매캐한 냄새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정문 앞을 지나가는 이들의 표정은 때때로 나른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덩실덩실 춤추듯 그곳을 뛰어다닌 것이 이제는 꿈이런가, 아득하다.)

  혁명으로 이름 붙이기엔, 작금의 이런저런 양태들을 보았을 때 참으로 낯간지러운 80년대의 학생운동과 물론 루마니아에서 1989년에 벌어졌던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만든 시민혁명을 하나의 선에 두는 것이 좀 어불성설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루하기 그지없는 - 사실 그들의 혁명과 나의 운동을 어거지로 가져다 붙이면서까지 감정이입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 영화를 보는 동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연민의 감정조차 가지기 힘들었던 듯하다.

  혁명이 완수되고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처형되고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2005년 12월 22일, 수도 부쿠레슈티의 동쪽에 자리잡은 소도시의 자그마한 방송국 사장이자 프로그램 진행자인 즈데레스쿠는 “1989년 12월 22일, 우리 마을에 혁명이 있었나요 없었나요?”라는 물음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하지만 애초에 참가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펑크를 내고 알콜중독자인 역사 선생 마네스쿠와 산타클로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 퇴직 노인 에마노일이 대신 프로그램의 패너롤 등장하며 TV 프로그램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차우세스쿠가 도망가던 12시 8분을 기점으로, 이미 그 이전에 마을의 광장에 도착하였다고 역사 선생이 주장하자마자 그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역사 선생은 술이나 마시고 있었을 것이라며 반박한다. 게다가 또다른 프로그램 참가자인 에마노일 노인은 계속해서 쓸데없이 종이나 찢고 앉아 있으면서, 그날 있었던 자기 아내와의 신변잡기적 이야기들로 프로그램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그날 부쿠레슈티에서 아들이 죽었어요. 하지만 난 반박하려고 전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밖에는 눈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전화했어요. 행복했던 옛날처럼 눈을 즐기세요.”

  하지만 (전직 비밀경찰이자 이제는 자본가가 되어 있는 인물까지 등장하는) 이 엉뚱하고 소박하며 소란스럽고 천진해서 코웃음이 나올 지경인 토론 프로그램의 말미, 혁명의 과정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었다는 한 여인은 지극히 평범한 어투로 눈이나 즐기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을씨년스러운 마을에 하나하나 가로등이 켜지는 모양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꽤나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어찌보면 사건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이란 면에서 동유럽 TV 프로그램으로 건너간 <라쇼몽> 같기도 하지만) 별다른 스토리도 없고, 저 옛날 예술 영화를 보는 것처럼 카메라는 온전히 고정된 채 잘 움직이지 않고, 혁명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이 영화를 즐겁게 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도대체 내게는 절대로 유머스럽지 않았다고...) 

  그럼에도 혁명과 무관한 듯 그렇지 않은 듯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여전히 피곤하다는 사실에는 퍽퍽하나마 동감이 된다. 세상은 바뀔 것이라는 신념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꽤나 사실적으로 움직였던 나는, 비루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21세기 천민자본주의의 최고봉이라 감히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딱 그만큼 추레하게 살아가는 나를, 혹은 그 반대를 종종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하니까...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12:08 East Of Bucharest, A Fost Sau N-A Fost?) /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 / Mircea Andreescu, Ion Sapdaru 출연 / 89분 / 20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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