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깃꼬깃한 삶의 한 자락을 부스럭거리며 활짝 폈더니...
사십대에서 환갑을 넘은 나이까지 골고루 포진한 여인네들의 일상이 때로는 꽁트처럼 때로는 그리움 가득한 대하소설처럼 그려지고 있다. 작가 자신의 나이처럼 그득그득 베인 삶의 꼭지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나의 미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매캐하다.
「그리움을 위하여」.
“...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남해의 섬, 노란 은행잎이 푸른 잔디 위로 지는 곳,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낚아 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그런 섬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인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음으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움을 느끼는 것에 연배가 무슨 상관이랴 싶지만 여하튼 짧은 생각으론 삶이 켜켜이 쌓일 수록 그만큼 그리움의 폭과 깊이도 넓고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그리움이 조금 뒤늦게 찾아온다고 하여도 싫지 않을 듯하다. 모든 그리움에는 타당한 이유보다는 어정쩡한 숙명이 깊게 작용한다. 노작가의 시선은 성기어 보이지만 그렇게도 쉽게 숙명적인 우리들 삶을 관조한다.
「그 남자네 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는 평화’가 더욱 거룩하게 느껴지던 전쟁 후의 그 시절 그 때 그 남자가 살던 집을 향한 나의 그리움은 바로 그 근처에 집을 얻은 후배네를 방문하면서 극대화된다. “...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겨우겨우 다스리게 되는 젊은 시절 나의 위험했던 갈망과 ‘새대가리’ 같았던 선택을 향한 노부인의 다독임...
「마흔아홉 살」.
“... 명치가 등에 붙을 듯이 날씬하다가도 생명만 잉태했다 하면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오르던 배는 이제 두꺼운 비계층으로 낙타 등처럼 확실한 두 개의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허리의 후크를 풀자 역겨운 트림이 올라왔다. 자신이 비곗덩어리에 불고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메마른 설움이 복받쳤다. 위선도 용기도 둘 다 자신이 없었다...” 늦은 나이에 아내와 별거를 하고 있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시아버지의 속옷을 향하던 적의, 그리고 동네 부인들과 함께 하는 노인을 위한 목욕 봉사할 때의 그 살가운 손길 사이에는 틈이 있는 것일까 끈적이는 연관만이 있는 것일까... 마흔 아홉, 그 나이 그 상황이 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
「후남아, 밥 먹어라」.
“후남이는 알맞게 부숭부숭하고 따끈한 아랫목에 편안히 다리 뻗고 누웠다. 그리고 평생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았다. 밥 뜸 드는 냄새와 연기 냄새와 흙냄새가 어우러진 기막힌 냄새가 콧구멍뿐 아니라 온몸의 갈라진 틈새로 쾌적하게 스며들었다...” 추레하기 그지없는 집안의 마지막 딸로 태어나 스스로 미국행을 택한 후남이는, 마음 속 깊은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였던 치매 걸린 엄마를 찾아 미국에서 한국, 그것도 한갓진 시골까지 어려운 걸음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 모든 그리움의 원형과도 같은 어린 시절의 한 때를 온 몸으로 떠올리는 것만 같다.
「거저나 마찬가지」.
“... 그들도 이제 거저나 마찬가지에 길들여져 나에게 거침없이 그런 일을 시켰고 마음에 안 들게 한 것은 타박을 하기도 했다... 나는 비로소 ‘거저나 마찬가지’를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거저면 거저고 아니면 아니지 마찬가지란 무엇일까...” 한 편의 긴 꽁트를 보는 듯... 가진 자의 천박한 선민의식 혹은 가지려하는 자의 유치한 사기성 발언은 교묘하게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렇게 ‘거저나 마찬가지’라는 말에 혹하여 부림을 당하면서도 스스로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드디어 자신의 자존을 향하여 한 걸음을 떼어놓게 된 것일까...
「촛불 밝힌 식탁」.
아, 이것은 정말 꽁트?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살고 이제 자신의 남은 재산까지를 자식들과 공유하게 되지만, 결국 이 노쇠한 아버지가 알게 되는 것은 어두움 속에 웅크린 채 자신들로부터 멀어지려 앴는 자식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마누라한테도 알릴 수 없는 무겁게 쳐진 자기 자신일 뿐...
「대범한 밥상」.
“재산은 더군다나 이 세상에서 얻은 거고 죽어서 가져갈 수 없는 거니까 결국은 이 세상에 속하는 건데 죽으면서까지 뭣 하러 참견을 해. 이 세상의 법이 어련히 처리를 잘 해줄까 봐. 손자들 말고 그거 가로챌 사람 아무도 없어. 손자들이 너무 잘나거나 너무 못나서 제 몫을 못 챙겨도 그게 이 세상에 있지 어디로 가겠냐?” 항공기 사고로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여자와 남자,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진 어리디 어린 손자와 손녀... 여기에 어마어마한 보상금까지 합쳐지면 세상은 그들을 동정하면서 동시에 흠흠 냄새 맡기에 여념이 없어지는 것도 사실일 터...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헛헛해진 그들의 가슴을 푸짐하게 만들었던 것, 그들의 진실을 알기 위하여 찾은 곳에서 나는 대범하고도 푸짐한 밥상을 받게 된다.
「친절한 복희씨」.
“... 내 자식들이 차례차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대학생의 얼굴을 잊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목적을 달성한 건지 못하고 만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기대한 성취감 대신 슬픔만이 남았다.” 삶의 방편으로 세상없이 착하고 순하다는 이미지를 스스로 일구었던 나에게 이제 남겨진 것은 수족을 제대로 쓸 수 없으면서도 비아그라를 찾아드는 노망난 남편 뿐이다. 그 옛날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그로 인하여 여인의 향내를 풍기게 만들었고 그 향내로 인하여 주인집의 후처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그 왼죄와도 같았던 대학생을 떠올려보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리고 이제 내 손에 남겨진 것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시집올 때 집에서 훔쳐나온 아편 한 덩어리...
「그래도 해피 엔드」.
도시 근교로 삶의 거처를 옮기고 마냥 뿌듯해하던 노부인이 도심으로 외출하는 중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의 향연... 늙으면 죽어야지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은 그날의 길고도 더뎠던 외출, 하지만 마지막 젊은 택시 기사의 “사모님 어쩐지 멋쟁이다 싶었는데 외국에서 오래 사시다 오셨나 봐요. 그렇죠?”라는 한 마디와 유턴을 마다하지 않고 쥐어주는 잔돈... 그래서 해피 엔드인 하루...
박완서 / 친절한 복희씨 / 문학과지성사 / 302쪽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