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곡하게 설파되는 우주 저편의 비경과 비의...
SF에 가까운 경계 소설(“... 경계 소설의 영어 원어에 해당하는 슬립스트림slipstream은 본디 항공기의 프로펠러가 회전할 때 생기는 후류(後流) 혹은 자동차의 고속 주행시 그 뒷부분에 발생하는 공기 역학적 포켓을 의미하지만, 문학 비평적인 맥락에서는 주류 문학과 비(非) 리얼리즘 계열의 장르 소설 양진영의 작가들이 탈장르적인 상상력을 구사해서 쓴 일종의 경계적, 융합적인 문학 작품들을 지칭할 때 쓰인다...”)을 쓴 작가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에 이미 도달하였던 어떤 상상력의 경지에 경의를 보낸다.
「12월의 열쇠」.
“... 바로 우리 탓이에요. 애당초 우리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 똑똑해질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냥 머리가 나쁜 상태 - 짐승 - 로 남아 있었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그들의 진화를 촉진했던 거예요...” 한 행성을 자신들이 살기에 적합한 행성으로 개조하기로 작정한 Y7 <고양이 형태> 종족의 길고 긴 행성 개조 기간 중 오히려 그 행성의 짐승이 서서히 인간으로 진화해간다. 그리고 간혹 깨어나 그들을 도왔던 쟈리 다크는 어느 순간 그들이 숭앙하는 신이 되어버리는데...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금성의 물 속에 살고 있는 거대한 바다 짐승인 이키를 잡기 위하여 스스로 미끼가 되어버리는 나,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바다 짐승인 이키를 잡기로 작정한 그녀... 스스로 미끼가 되어 바다 짐승인 이끼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는 내가 잡은 것은 바다 짐승 이끼인가, 아니면 그녀인가...
「악마차」.
간혹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해주는 무인 자동차 경주가 있지만 작가는 이미 사십여년전에 스스로 자아를 지닌 자동차들을 소설 속에서 다루고 있다. 자동차들에 의하여 가족을 잃은 머독은 최강의 자동차인 제니를 만들어, 스스로 악마차로 규정한 그 자동차를 잡으러 다닌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자동차 소굴에 들어가게 되는데...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지구의 언어학자인 나는 화성인의 고등 언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하여 “... 녹슨 동전 같은 태양과, 채찍 같은 바람이 있으며, 두 개의 달이 폭주족처럼 숨바꼭질하고, 쳐다보기만 해도 불타는 듯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이 땅으로...”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화성의 종교적 제의인 로카의 춤을 추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고, 화성의 운명을 체화하고 있는 듯한 이 여인을 위하여 장미를 바치는데...
「괴물과 처녀」.
음... 그러니까 제물로 바쳐지는 처녀와 이러한 제의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는 릴릭...
「이 죽음의 산에서」.
우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진 <그레이 시스터>에 도전하기로 한 산악인인 나... 높이가 15마일에 이르는 (1마일은 약 1.6km) 이 산을 오르는 동안 계속해서 나를 방해하는 환영들, 그 환영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 것일까? 그악스럽게 산을 정복하려한 내가 마지막에 발견하는 것은 그러나 너무나 서정적이고 애틋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수집열」.
“들어 봐, 돌. 우리 숙부는 돌 수집가야. 알겠어? 넌 은하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지성을 가진 광물이고. 게다가 넌 내가 지금까지 찾아다닌 것 중 최대의 표본이야...” 돌을 수집하는 나외 디블deeble하는 돌...
「완만한 대왕들」.
글랜에 살고 있는 드랙스와 드랜이라는 두 명의 왕은 4세기에 걸쳐 다른 행성에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에 관하여 심사숙고하고, 그 조사 착수를 결정하기 위하여 다시 사계절이 두 번 지나가는 동안 조금 생각한 다음, 우주선을 보내 유인원 상태인 동물 두 마리를 잡아들이기에 이르는데...
「폭풍의 이 순간」.
지구에서 태어났지만 길고 긴 여행 끝에 이제 우주의 다른 행성인 베티에서 130개의 눈으로 행성의 감시 업무를 맡고 있는 헬캅Hell Cop인 나... 그리고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 혼돈의 날에 벌어지는 범죄...
「특별 전시품」.
자신의 예술이 비평가들에 의하여 난도질 당하는 걸 참다못해 스스로 예술품이 되기로 작정하여 미술관에 들어가 조각상이 되어버리는 나... 그리고 바로 그곳에 나처럼 스며든 여인 글로리아... 하지만 그곳에는 두 사람 말고도 또다른 살아 있는 예술품들이 존재하는데...
「성스러운 광기」.
자신과 다툰 이후 집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한 그녀... 그리고 어느 순간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코리다」.
만약 우리 인간이 투우장의 황소라면...
「사랑은 허수」.
“사고(思考)와 메커니즘은 전진해. 인간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지.” 프로메테우스의 현현인가...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거대한 무덤을 지키는 존 오든,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나 그와 불같은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그녀... “그녀의 책략과, 그녀의 입과 가슴이 안겨 주는 환희에 몸을 내맡기면서도, 자신이 화이올리와 살았던 모든 사내들처럼 그 마력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들의 힘은 그녀들의 가냘픔에 기인하고 있다...”
「루시퍼」.
인간은 사라지고 불빛마저 존재하지 않는 도시... 그곳에서 발전기를 돌리고 93초간 모든 것을 되살렸던 나의 울부짖음...
「프로스트와 베타」.
“...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가해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각(知覺)은 유기적이었습니다... 이유기적 지각의 결과 인간은 기분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종종 다른 기분과 감정을 만들어 냈고, 그것들은 또 다른 기분과 감정을 생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인식은 최초에 그 지각을 자극한 대상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사라진 지구, 인간을 대신하여 지구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다스리던 솔컴과 디브컴, 그리고 솔컴의 부하 중 하나였던 프로스트의 인간되기 프로젝트...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아서왕 그 원탁의 기사들은 어떻게 시대를 건너 뛰어가면서도 성배를 지켰는가...
강력한 지명도를 가진 이 미국 작가의 작품들은 꽤 흥미롭다. 그의 소설들은 굉장히 진지한 SF이면서 또한 믿기지 않는 일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소설들 안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생기를 부여받는다. 어둡고 음습한 우주의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는 고뇌가 담겨져 있다. 지구상에서의 고민은 이 작가에게 너무 소소하다.
로저 젤라즈니 / 김상훈 역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열린책들 / 498쪽 / 2002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