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던 튀바슈 가문의 위기...
세상에 들어설 때는 나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세상으로부터 나갈 때에는 나의 의지로 하겠다, 는 것은 사실 욕심이다. 설령 그렇게 의연하게 죽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한들 그것을 온전히 나의 의지라고 어떻게 모든 이들을 설득시킬 것인가. 자기 자신조차 설득시키기 힘들 터인데 말이다.
자살가게는 흔치 않은 소재여서 일단 흡족하다. 저 옛날 김영하의 소설에서 잠시 자살을 돕는 이가 있기는 하였으나 (사실 『자살가게』는 우화에 가깝다) 이렇게 가게를 차려놓고 손님들을 모으고 철저한 직업의식으로 무장한 채 자살도구들의 연구개발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대를 걸쳐 자살을 하나의 장사로 승화시키기가 어디 쉽겠는가, 이 튀바슈 가문에게도...
소설은 대를 이어 자살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튀바슈 가문의 이야기이다.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에게서 빌려온 미시마라는 이름을 쓰는 아버지, 약을 이용한 죽음의 대가이신 엄마 레크뤼스, 권총 자살로 우리들 어두운 광기의 예술혼이 얼마만한 금전으로 환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고흐를 본받아 자살 유원지를 계획하는 큰아들 뱅상, 그리고 축복받은 얼굴과 몸매에도 불구하고 비관주의의 대가인 (그렇게 샤넬 넘버 파이브를 입으시고 주무시다 돌아가신 분을 연상케 하는) 딸 마를린까지...
하지만 엉뚱한 전염을 위하여 만들어진 구멍 뚫린 콘돔을 실험하다 엉뚱하게 만들어져버린 막내 아들 알랭이 태어나면서 이 유구한 전통의 자살가게에 밝은 그림자(그래서 이들 가문을 어둡게 만드는)가 드리워지니 급기야 이미 갓난아기일 때 뭇사람들에게 귀여운 배냇미소를 지어보임으로써 “자, 독약이라…… 그래 어떤 걸로 권해드릴까? 만지는 거 - 글자 그대로 만지면 죽습니다 - 흡입하는 거, 먹는 거 이렇게 있는데요……”라고 권하는 엄마나 “오늘은 11월 1일…… 생일 축하한다, 마릴린!!! ... 이제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일 년 줄었다는 얘기다!”라고 딸을 축하하는 아빠를 혼비백산하도록 만들고 만다.
하지만 이런 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동성애자로 수모를 당하고 사과를 청산칼리에 적셔서 그림으로 그린 후 그 사과를 먹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 (그래서 애플사의 로고가 한입 베어 먹은 사과라고도 하는)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딴 알랭은 사람들을 죽이는 가게의 막내 아들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은 희망과 낙관으로 무장한 채 자살가게의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간다.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죠! 서툴거나 부족하면 서툴고 부족한 그대로 삶은 스스로 담당하는 몫이 있는 법입니다. 삶에 그 이상 지나친 것을 바라선 안 되는 거예요...”
알랭의 말이 제어되지 않는 욕망으로 똘똘 뭉친 현대인들에게 얼마만한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소설 속에서 이들 튀바슈 가문은 ‘죽어도 상관 안 해’ 상사라는 거래처까지 바꿔가면서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 (뭐냐 싶기도 하지만...) 여하튼 아등바등 위로만 솟구치는 롤러코스터를 타고야 말겠다는 허망한, 꿈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천박한 꿈으로 무장한 우리들을 향하여 보내는 작가의 아이러니 가득한 우화가 읽을만하다.
장 튈레 / 성귀수 역 / 자살가게 (Le Magasin des Suicides) / 열림원 / 213쪽 / 2007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