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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감독 〈국보〉

예술과 예술가가 무대와 현실이 합쳐지는 절묘의 순간...

by 우주에부는바람

일본 영화 〈국보〉가 이십이 년 만에 천만을 돌파한 실사 영화가 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나서 원작인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국보》를 찾아서 읽었다. 소설 《국보》를 읽는 동안 온나가타 그러니까 여장 남자 배우의 숙명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궁금하였고, 그와 주변 인물들을 품어내는 가부키라는 일본 전통극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 화려함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 것인지...


주인공인 키쿠오는 지방의 한 유력한 야쿠샤 가문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잃고 난 다음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에게 맡겨진다. 하나이 한지로에게는 슌스케라는 아들이 있고 가부키를 연마 중인데, 키쿠오가 그 옆에 서게 된 것이다. 키쿠오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고 슌스케에게는 가문의 피가 흐른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형제처럼 자라지만 이후 숙명의 라이벌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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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의 특징 중 하나는 주연급 배우의 경우 철저하게 세습 가문의 일원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이다. 슌스케는 하나이 한지로의 뒤를 이을 혈연 관계에 있었지만 하나이 한지로는 자신의 이름을 키쿠오에게 넘긴다. 슌스케는 이후 집을 뛰쳐나갔고 키쿠오에게 세습을 위한예식을 치르는 동안 하나이 한지로는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하나이 한지로의 입에서는 슌스케라는 아들이 이름이 튀어 나온다.


가부키 배우의 세습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된 키쿠오와 슈스케의 갈등이 영화의 날실 역할을 한다면 가부키라는 전통극 자체는 영화의 씨실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이 예술가로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동안 가부키라는 예술이 곧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무대가 되어 준다. 극도의 형식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가부키와 가부키 배우가 영화 안에서 하나인 듯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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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언제였더라? 그 키쿠 씨가 몸져누워서 근처 술집에서 계란주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가져간 적이 있었지. 그랬더니 키쿠 씨가 많이 좋아했어. 한동안 누워 있는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는 참 좋아’라고 하길래 ‘이런 더러운 여관이 어디가 좋아요’ 하고 웃었더니, ‘그래서 좋은 거지’라는 거야. ‘······여긴 아름다운 게 하나도 없잖아. 그래서 이상하게 안심이 돼. 왠지 마음이 놓인다고. 이제 괜찮다고,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라던데.” (《국보》 하권, p.194)



소설을 읽으면서 눈에 밟히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두 사람 이전에 이미 온나가타의 큰 스승이었던 만기쿠는 말년에 사라지고 한 허름한 여관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그리고 그가 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영화에서는 만기쿠가 직접 키쿠오에게 말한다), 만기쿠는 그곳이 아름답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평생을 아찌할 정도의 화려함, 그러나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는 절제의 아름다움 안에서 살아야 했던 노배우의 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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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타임 175분의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고 가부키를 모르는 사람도 즐길 만 하다. 실제 가부키를 본다면 영화 속에서처럼 즐길 수 있지는 않겠지만 이것으로 족하다 싶다. 아내는 〈국보〉의 천만 돌파에 일본의 국뽕 영화일까, 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어쩌면 우리가 오래전 영화 〈서편제〉에 의외의 열광을 보여줬던 것과 비슷한지 모르겠지만, 예술과 예술가가 무대와 현실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합쳐지는 이 영화가 이끌어내는 감정은 역시 대단하다.



이상일 감독 /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쿠로카와 소야, 와타나베 켄 출연 / 국보 (KOKUHO) / 175분 / 20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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