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 로드리게즈의 눈빛에 눈맞추다...
인사동을 걷다가 우연히 영화 포스터를 발견한다. 아 보려고 했었는데. 마침 시간도 적당하다. 영화를 보고 광화문까지 걸어가서 시위에 참가하면 될 듯하다. 이곳이 아니면 하는 곳도 없는 영화다. 요즘엔 이런 영화만 눈에 뜨이네.
영화는 재미로 충만하지는 않지만 꽤나 볼만하다. 특히 주인공인 다이아나 구즈만으로 분한 미셀 로드리게스의 눈빛은 좀체 잊기 힘들다. 언제나 아래에서 위를 향해 치켜 뜨는 흰자위가 많은 눈동자는 자 언제든 준비되어 있으니 덤벼봐, 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싸움을 일삼는 여고생, 그리고 자살한 엄마를 둔 노동자 계층의 딸, 마초적인 라틴계 아버지를 둔 남동생의 누이... 한번만 더 싸우면 퇴학이라는 경고를 받은 구즈만은 동생이 다니는 권투도장에 들렀다가 스스로 권투를 하게 된다.
살인과 강간이 너무도 쉽게 일어나는 브룩클린의 한가운데에서 소녀로 살아가는 일은 다른 곳의 소녀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폭행 속에 자살로 마감한 어미를 둔 딸의 살아가는 방식 또한 일반적일 수는 없다. 때문에 구즈만의 일상은 분노로 가득했고, 권투는 이제 그녀의 삶을 지배하는 패턴이다.
구즈만이 보여주는 육체와 정신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육체를 단련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녀의 정신 또한 함께 단련되는 중이다. 그 사이 사랑도 찾아든다. 같은 체급으로 도장에서 만난 에드리안.
금방이라도 상대방을 찔러 버릴 듯한 눈빛의 그녀가 에드리안에게 키스를 당하고 짓는 웃음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행복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싫지 않지만 좋아하기엔 좀 시시할 수도 있다는 듯한 그 쓰으, 입을 한번 훑으며 짓는 미소는 색다르다. 서너 시간만 진행된 전날의 취침 시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된 주말의 오후에 들어간 동굴 같은 영화관에서 흥건하게 찾아든 졸음이 일순간에 달아났으니 뭐...
결국 같은 체급인 구즈만과 에드리안은 사랑하는 감정에도 불구하고 링에 오르고, 대결을 펼치게 되지만, 결과는 말하지 않으련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라치면 그럴 수 있겠고, 성장영화라고 볼라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게는 미셀 로드리게스의 영화, 라고 기억될 듯하다. 또한 여성의 육체에 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육체에 대한 영화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이기도 하다. 단련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단련되고 있는 다른 이를 바라보는 날것의 감정, 그것을 자기 몸에게로 옮겨보고자 하는 욕구까지... 만족스럽다.
걸파이트 (Girlfight) / 캐린 쿠사마 감독 / 미쉘 로드리게즈, 제이미 티렐리, 폴 칼데론 / 110분 / 2002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