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사적인 여행의 기록 사이로 배어 나오는 파장의 맛...
“... 내가 소설에서 여행자를 즐겨 다루는 것은 여행이 사랑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여행과 사랑은 흔들림이자, 충격이자 진동, 삶의 지진입니다...” (p.17)
과연 그럴까 싶지만 일단 믿기로 한다. 어쨌든 작가는 이러한 믿음을 전제로 하여 글을 쓰고 여행을 하고 있다. 작가에게 여행과 사랑은 비슷한 맛의 소스이고, 작가에게 충격은 격심한 흔들림을 동반하는 무엇이다. 이 기획된 여행기는 바로 자신의 어떤 여행 안에서 발현된 흔들림의 파장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 파장은 잘 다독여져 있어서 극심하게 다가서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멀미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것이 독자인 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다.
“두 시간쯤 입국장에서 기다린 후에, 잠자는 남자가 탄 브리티시 에어의 착륙 표시등이 켜진다. 그 사이 나는 페렉의 <잠자는 남자>를 절반 가까이 읽는다. 나는 매혹당한다! 파리의 <잠자는 남자>에게, 내 가슴은 두근거린다. 언젠가 이 책을 주제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서평이 아닌, <잠자는 남자>와 함께 하는 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일지, 혹은 어떤 형식의 글이 될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페렉의 책 <잠자는 남자>를 갖고 떠난 아주 단조롭고 평범한 여행에 관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 (pp.28~29)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다. 그것은 책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조르주 페렉의 책 <잠자는 남자> 그리고 그 아우름을 뚫고 나와 배수아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는 현실 속의 ‘잠자는 남자’가 즐겁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배수아의 손에 들려 있는 <잠자는 남자>와 배수아를 향하여 렌즈를 들이미는 ‘잠자는 남자’라는 묘한 겹침이 좋기 때문이다. <잠자는 남자>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잠자는 남자’의 캐릭터를 향하여 저절로 이끌렸다.
“... 잠자는 남자의 여행 가방은 이동 도서관처럼 항상 책과 영화 필름으로 가득하다. 그가 들고 다니는 검은 배낭에는 카메라가 있다. 그가 여행에 가지고 다니는 이외의 내용물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서너 벌의 검은 티셔츠, 날이 추워질 것을 대비한 단 한 벌의 검은 스웨터, 그리고 여벌의 속옷과 양말 두어 켤레가 전부이다.” (p.65)
배수아보다 여섯 살이 많은 ‘잠자는 남자’의 이름은 Werner Fritshc 이다. 두 사람은 때때로 각자의 나라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만난다. ‘잠자는 남자’는 자신의 잠을 찍어달라고 배수아에게 부탁하지만 배수아는 아직 그것을 성공하지 못했다. (배수아는 이 글을 쓰기 직전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막 번역 출간한 참이었다. 그리고 페소아의 책의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잠’이다.)
“... 집에서 글을 쓸 때, 그는 선명한 푸른색의 커다란 판초를 입는다. 판초는 카펫처럼 두껍고 촉감이 단단하여 마치 인디언의 텐트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작업복이다. 푸른색 판초 차림으로, 높은 푸른색 책상에 서서 그는 글을 쓴다. 나는 예전에는 서서 글 쓰는 책상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서서 글 쓰는 작가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하지만 잠자는 남자는 그렇게 한다...” (p.233)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독일의 작가와 글을 쓰고 번역을 하는 한국의 작가는 이번 여행기에서는 미국의 LA에서 만난다. 그들은 할리우드 드림 호텔, 아마고사 오페라 하우스 호텔과 같이 저렴하게 고풍스러운 호텔에서 묵어가며, 목적지인 데쓰 밸리에서 서로를 찍는다. 그리고 재회에 대한 약속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또 헤어진다. 오히려 여행의 마지막, 배수아의 상념을 뚫고 들어서는 것은 헤어진 애인으로부터의 전갈이다.
“나와 애인은 서로에게 오직 사생활을 위한 대상이었다. 동거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각자의 집을 유지하는 커플이었지만 사실상 사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했다.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요리를 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의 집에서 작업을 했다. 우리의 집에는 두 사람분의 책상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저녁 산책을 나섰다. 애인과 함께하는 사생활은 근사했다. 사생활이란 기록되지 않는 역사와도 같았다. 즉 어떤 의미로 본다면, 사생활은 개인의 진짜 인생이었다.” (p.185)
배수아는 여전히 대범해 보인다. 배수아가 작가로 등장하던 시기에, 배수아는 그즈음의 작가들과는 여러모로 사뭇 달랐다. 그렇게 책은 여행기이면서 동시에 매우 사적인 배수아의 기록으로도 읽힌다. 배수아가 원한다면 아마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글처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수아는 그 정도로 대범하지는 않거나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 또한 독자인 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배수아 / 배수아, Werner Fritsch 사진 /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 gasse 가쎄 / 249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