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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여행할 권리》

이동경로나 장소가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내면의 공동을 찾아서.

by 우주에부는바람

‘문학은 가장 멀리까지 가본 자들만이 하는 행위다.’ 라고 산문집의 어느 꼭지에선가 작가는 말한다. 물론 여기서 멀리까지, 가 꼭 물리적인 거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문장을 말하기에 앞서 김연수는 실제로 미국을 갔다 온 박인환보다 미국 혹은 유럽으로 떠날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지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였던 이상과 김수영을 더 ‘멀리까지 가본 자들’이라고 생각함을 알 수 있다.


“...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는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p.201)


산문집의 제목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고, 실제로 작가가 일본, 독일, 미국, 중국 등지에서의 경험담을 토대로 하여 작성된 글들이지만 이것은 기행문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문학론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비로소 어떤 의구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시선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시선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문학을 할 수 있는 어떤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p.47)


특히나 일본, 독일, 중국 등은 (산문집 속 미국의 버클리도 어떤 소설인가의 배경이 되었던 건가...) 작가가 《꾿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와 같은 소설의 배경이 되거나 주인공의 활동 무대가 되는 공간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곳에서 소설을 잉태시키고 소설을 발전시키고 소설이 혼자 움직이도록 하면서, 동시에 문학 전반에 대해 생각하고, 비로소 어떤 회의를 통하여 진정한 삶의 영역에 접어들게 된다.


“모든 건 너에게 달린 문제다. 네가 여기서 살고 싶다면 너는 여기서 살 수 있다... 지금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도 한때는 모두 불법체류자들이었어.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살고 싶다면 너는 살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버클리에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이처럼 간단했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삶만 알아내면 된다. 그 다음에는 그냥 살면 된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p.101)


그러니까 여타의 여행 산문집에 비하여 무겁게 느껴질 수 있을 법 하다. 이동 경로나 장소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내면의 어떤 공동, 그 공동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를 더욱 중요시하는 산문집이다. 그렇게 작가에게 있어 여행은 물리적인 거리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로막음을 떨쳐내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 경계를 통한 물리적 폐소를 벗어나는 것에 있다.


“... 민족문학을 통해 우리는 민족공동체의 경험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다른 민족의 경험은 배타적으로 거부했다. 저항적 민족주의가 필요하던 시기가 끝났다면, ‘저항적’이라는 한정사만 버릴 게 아니라 ‘저항적 민족주의’란 말 전체를 폐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한민족 문학이 가까운 미래에 목도하게 될 가장 당황스런 장면은 외국계 한국인이 창작하는 한국어 문학이 아닐까? 그때도 한민족 문학은 존재할 수 있을까?” (p.222)


작가의 이러한 문학관은 때때로 우리 안에 생래적으로 고착된 어떤 민족문학적 근황에 대한 반발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작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인류 보편의 성정에 도달해야 한다는 문학관에 찬동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족문학의 특수성을 과소하게 평가하는 것에는 반발심이 든다. 경계 없음은 어쩌면 다양성과도 연결 지을 수 있는 바, 민족주의로 모든 것을 끌고 들어가는 블랙홀처럼 무거운 민족문학만이 아니라면, 과거의 그리고 (여태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현재의 민족문학 또한 우리 문학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김연수 / 여행할 권리 / 창비 / 290쪽 / 20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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