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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가의 일》

생각하지 말고, '핍진성'을 전제로 한 '감각 이입'의 문장을 일단 쓰다

by 우주에부는바람

동년배 작가인 김연수의 글을 즐겨 읽는다. 그의 (소설) 등단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94년 작가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였을 것이다. 햇수로 이십여 년이되었다. 그간 작가는 몇몇 해를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장편소설과 소설집과 산문집과 번역서를 썼고, 나는 그것들을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름의 창작론, 쉽고 재미있으며 구체적이고 (문청들에게 필수일 법한) 생활밀착형 창작방법론을 내놨다. 문학동네 출판사의 인터넷 까페에 연재했던 글이라고 한다. 요모조모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특히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내용들이다. 몇몇 부분만 발췌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나면 그건 도무지 내가 쓴 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새로운 사람, 즉 신인新人이 됐다...” (p.19)

- 아주 가끔씩, 한 편의 글이 아니라, 내가 쓴 하나의 문장을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은 있다. 거기에서 그쳤기 때문에 신인新人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뭐 아직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니까...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 ...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는 저마다 각자의 욕망이 있고, 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그 욕망은 갖은 방해물로 인해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의 이야기가 생긴다...” (p.37)

- 헐리우드의 시나리오 창작자들이 사용하는 아주 기본적인 도식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 공식을 책의 내용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이야기 구성의방식도 조금씩 구체화되어 간다. 그것을 잘 따라가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 플롯과 캐릭터 같은 건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멋진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해도 문장만은 제일 먼저 쓴 문장이 제일 안 좋다. 그래서 소설가에게 필요한 동사는 세 가지다. ‘쓴다’ ‘생각한다’ ‘다시 쓴다’. 소설가는 제일 먼저 ‘쓴다’. 그 다음에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쓴다’...” (p.74)

- 생각을 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나서 생각하라는 작가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물론 쓰기 위하여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생각에 그치고 쓰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위한, 그리고 오랜 생각 끝에 쓰고 거기에서 멈춰버리고 마는 이들을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서사적 허구에 사실적인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수용하는 관습화된 이해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소설 창작의 한 방법으로, 구체적으로는 동기 부연 세부 묘사 등의 소설적 장치를 들 수 있다’ (p.80)

- ‘핍진성’이라는 단어, 참 오랜만에 들었다. 책의 내용 안에서는 훨씬 쉽고 구체적으로 ‘핍진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왠지 내게는 이렇게 정리된 내용이 더 이해하기 좋으니, 역시 잘못된 문학 교육의 탓이려나...


“... 주인공이 자신의 캐릭터 설정 때문에 다리를 불태우면 캐릭터 중심, 캐릭터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외부의 사건 때문에 다리가 불타면 플롯 중심이다. 캐릭터 중심의 소설은 내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느리며, 플롯 중심의 소설은 외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빠르다.” (p.97)

- 작가는 소설은 보통 3막으로 이루어지고, 그 1막이 끝나는 지점을 주인공이 자신이 건너온 다리를 불태우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 변곡점이 어떻게 발현하느냐에 따라 소설을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이 모든 감정들이 중요하겠지만, 생고생하는 이야기, 즉 소설에서는 오직 하나의 감정이 특출나게 중요하다. 그건 바로 절망(혹은 좌절)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기대가 크게 꺾이는 것... 이런 느낌이나 기분이 소설에서는 너무나 중요하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소설 속의 모든 주인공들은 오로지 이런 느낌이나 기분을 맛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pp.146~147)

- 얼마 전 까페 여름의 후배와 콤플렉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어떤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작가의 문법에 따르자면 생고생, 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혹은 보편타당한 ‘절망(혹은 좌절)’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모두 핑계에 불과한 것을 모르지 않는다...


“... 문장에서 미문은 흔치 않은 일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문장이다... 세심하게 관찰을 잘 하면 누구나 다 미문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선생들이 좋은 문장을 쓰려면 남다른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는 미문은 미묘하게 다르다. 소설에서는 흔한 일을 흔치 않게 쓸 때 미문이 된다. 공원에서 백조를 보는 일은 흔한 일이다. 대부분은 별 감흥이 없이 백조를 보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백조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p.173)

- 소설에서는 무엇을,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끼느냐, 보다 지금 누가,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끼고 있느냐, 하는 설정에 따라 문장 또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그 누군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날려 보낸 매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인디언 추장처럼...


“...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완성시킬 때는 물론 감정이입이 가장 중요하지만, 막상 소설의문장을 쓸 때는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 이입되어야만 한다... 소설을 쓸 때, 생각하지 말자고 한 것은, 생각을 생각할 생각도 하지 말자고 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소설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 단어들로 문장을 쓰는 일이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 그게 소설 문장의 시작이라면, 끝은 그렇게 알아낸 감각적 묘사를 유사한, 하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다른 감각적 표현으로 치환하는 일이다. 이 치환을 좀더 능숙하게 하려면 평소에 감각하는 연습을 많이 해서 더 많은 감각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금 뭐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지,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떤 맛이 나는지, 자신에게 묻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라도 쓸 수 있다면, 그걸 문장으로 쓰자. 자기가 지금 뭘 보고 듣고 만지고, 또 어떤 냄새와 어떤 맛이 나는지...” (p.217)

-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 이입되어야만’ 쓸 수 있다, 는 작가의 말에 수긍한다. 감정의 이입은 그저 저자와 독자 사이의 간극을 없앰으로써 그 간극을 깨닫도록 만든다고나 할까... 그러니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배워야 하는 문장 학습의 도는 소설가가 펼치는 감각의 법칙을 엿보는 일이 될 터이다...



김연수 / 소설가의 일 / 문학동네 / 264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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