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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첩기행 : 예의 길을 가다》

예술가 그리고 예술가의 궤적이 할퀴고 간 장소를 화첩에 담아...

by 우주에부는바람

김병종은 ‘화첩기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1999년부터 지금까지도 그리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책은 그 ‘화첩기행’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예의 길을 가다’라는 부제처럼 한눈 팔지 않고 ‘예’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갔던 예술가들과 그 예술가들을 품었던 장소가 이 책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예술적 전통이 제대로 발굴, 보존되고 있지 못한 현실 상황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이 곳곳에 짙게 배어 있다. 그가 마음으로 담아낸 예술가, 그리고 발로 뛴 장소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이난영과 목포, 진도소리와 진도, 강도근과 남원, 서정주와 고창, 허소치와 해남·진도, 이매창과 부안, 윤선도와 보길도, 운주사와 화순, 임방울과 광산, 이효석과 봉평, 김삿갓과 영월, 아리랑과 정선, 나운규와 서울·남양주, 김명순과 서울, 최승희와 서울·도쿄, 정지용과 옥천, 나혜석과 수원, 이건창과 강화, 김동리와 하동, 안동 하회와 별신굿 탈놀이, 이인성과 대구, 남인수와 진주, 박세환과 경주, 문장원과 동래, 암각화와 언양, 이중섭과 제주, 정선과 금강사, 최북과 구룡연, 최익현과 금강산...


목록에는 허소치, 이매창, 임방울과 같은 판소리 예인뿐만 아니라 남인수와 이난영 같은 대중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어 (아리랑이나 별신굿은 차지하고) 특이하다. 정통 혹은 주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부분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 뿌리가 깊게 자리하고 있는 대중 예술과 대중 예술가 또한 우리 문화의 한 축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것들을 끌어안고자 하는 작가의 사려 깊음이 살펴지는 대목이다.


“... 사실 조선조의 예술사는 어떤 면에서 배소(配所, 유배지)의 예술사였다. 정치적 박해와 소외의 아픔 속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이루어낸 위대한 아웃사이더들의 예술사였다. 송강과 다산과 추사의 예술은 한결같이 쓰라린 인고(忍苦)의 세월 속에 피어난 꽃들이었다. 게다가 험하 세월을 산 것으로 말하자면야 고산만한 이도 드물 것이다. 왕자의 사부로 경학, 천문, 지리, 공학, 건축으로부터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이루지 못한 글이 없었고 통달하지 못한 학문이 없었건만, 서른 살에 시작된 귀양살이는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배소에서 보낸 기간만 20년에 삭탈 관직 또한 부지기수였다...” (p.74)


그렇다고는 해도 전체적으로는 우리가 알만한 인물들로 거뜬하게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들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들은 ‘인고의 세월’이라는 공통된 요소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가의 아픈 궤적은 그들이 머문 장소를 할퀴고 지나가게 마련이니, ‘화첩기행’이 예술가와 예술가의 장소를 하나로 엮어 기획되고 있는 것은 적당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조합에 작가가 언제나 순응만 하는 것은 아니다. ‘파리한 지성과 논리 아닌 억센 순정(純情)과 야만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소설가 이효석의 자연이 보여주는 ‘원시적, 성적 매력’과 봉평, 장평의 ‘낮은 구릉이며 돌멩이투성이의 산길’의 언밸런스함을 지적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의 역사는 묘하다. 묘하다 못해 짓궂고 짓궂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동반자이면서 적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양자는 철저하게 채움과 비움의 동어반복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생전에 채워 있는 예술가는 사후에 비워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 평가와 명예와 그 부요함마저도.... 그러나 당대의 역사가 잔인하게 짓밟거나 유린해버린 예술가일수록 후대의 역사는 보상하려 든다. 이중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p.263)


이러한 글들과 더불어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을 보는 재미도 적잖다. 문필가이기 이전에 화가인 작가는 자신이 대상으로 삼은 예술가와 그들이 흔적을 남긴 장소 그리고 그들의 예술혼을 직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소품 같은 그림을 빼먹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시, 화, 서 혹은 문학, 미술, 음악의 여러 갈래들을 구분하지 않고, 예술가의 감각으로 촉수를 뻗고 있는 정갈한 글과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다.



김병종 / 화첩기행 : 예의 길을 가다 / 효형출판 / 301쪽 / 1999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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