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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지구, 그 어엿한 '푸른 물방울'의 세상 위를 엄연하게 떠다니며 길어 올

by 우주에부는바람

“가도 가도 푸른 바다뿐이었다. 섬 하나 없었고 하루종일 엇갈려 지나가는 배 한 척 볼 수 없던 날도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항해사가 해도에 점 찍어놓은 배의 위치 표시 정도였다. 그렇게 여러 날 계속되자 동행했던 안상학 시인이 탄식했다... 하, 진짜 물 많데이... 누가 이것을 지구地球라 캤노, 이게 水球지, 지구가? ... 그는 내륙 깊숙한 경북 안동 사람. 이 거대한 물덩어리가 낯설었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무심하게 혼잣말을 이었다... 내 이 별이 뭔고 했더니 허공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이었구만그래.” (pp.11~12)


주옥 같은 문장이나 표현들이 많다. 동료 작가들과 함께 (원양어선을 탄다거나 북극이나 남극을 향하는 탐사선에 동행하는 식으로) 먼 여행을 떠나곤 하는 저자가 함께 하였던 안상학 시인의 표현을 전한다. 그러니까 지구는 ‘푸른 물방울’... 칼 세이건은 명왕성 근처의 보이저 1호가 찍어서 보낸 지구 행성의 사진을 향해 ‘Pale Blue Dot 창백한 푸른 점’ 이라고 했다던데, 시인은 지구의 푸른 바다 위에서 스스로 지구를 바라보며 ‘푸른 물방울’이라고 했단다...


“한평생 사는 중에 걱정 근심 없는 날 다 하벼도 열흘이나 될까, 는 옛사람들이 이미 노래로 불렀던 말이다. 밤이면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본능은 거기에서 왔다. 누구나 눈물이 날 것 같으면 고향생각을 하게 되는 법이니까. 우리는 우는 종족인 것이다. 울고 난 뒤에 그 다음번 울음을 울면서 그동안 살아왔다. 행성 간을 싸돌아 다니는 여행객이 차 한잔 하려고 들렀다가 이 별의 특산품은 무언가요, 물어온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눈물입니다.” (p.19)


한창훈의 이전 책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를 읽게 되면 선뜻 그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에도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이전 작품이 밥상 위에 올라가는 바닷것들이 주인공이었으니, 이번에는 술상 위에 올라갈 법한 바닷것들이 주인공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술상 위에 올라갈 법한 바닷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주인공은 바다 속의 생물들이 아니라 바다 위를 떠다니는 인간들이다.


“... 몸에 병이 하나도 없는데 죽고 싶어질 때가 바로 멀미할 때입니다. 특히 풍랑 속의 낡은 어선이라면 더 심각하죠. 약은 하납니다. 소주를 마시죠. 잔이나 종지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런 바가지에 댓병 하나 가득 따르고 원샷을 억지로 시킵니다. 일은 해야 하니까 죽자사자 마십니다. 좋아지거나 아주 나빠지거나 둘 중 하나죠... 일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여자 생각 간절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pp.108~109)


그 인간들의 실상을 작가는 아름답고 훌륭한 문장과 그 문장의 연속들로 보여준다. 그것은 때로는 일상의 노련해지지 않는 애환이 깃든 시 같기도 하고 삶의 끄트머리에나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사유의 아포리즘 같기도 하다. 이전 책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가 일정한 형식과 그 근거를 이루고 있는 《자산어보》에 얽매어 있다면, 이번에 저자는 그러한 틀로부터도 마냥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이 그만큼 넉넉한 글로 변환되어 있다.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배는 전복되거나 떠밀린다. 떠밀림의 끝은 좌초이다. 배가 그냥 있으면 훨씬 심하게 파도를 탄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싣고 있으면 더하다. 그러니 가야 한다. 울어도 가야 한다. 바다가 늘 그러하듯이 세상이 우리를 내보낸 이유는 이렇게 흔들리라는 것이다.” (p.112~113)


거대한 배를 타고, 그곳에서 마치 기약이 없는 것 같은 항해를 뱃사람들과 함께 하는 작가와 동행하면 그 하루하루의 삶이 짜깁기 되기 전의 조각보와도 같아 보인다. 어느 때 그 한 토막은 삶이 고밀하게 축약된 조각보 같기도 하고, 또는 추레하고 누더기 진 삶의 한 조각 같기도 하다. 그래서 서쪽으로 한 번 그리고 북쪽으로 또 한 번 떠났던 작가의 긴 여정은 (책의 다른 부분들도 무한정 좋지만) 더욱 눈길을 끈다.


“아주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방울이다. 너울도 잠잠해졌다. 두번째 면도를 한다. 승선 3일째엔가 손톱을 깎았다. 나는 손톱과 수염으로 시간이 간 것을 확인한다. 사는만큼 머리카락고 손톱 발톱을 세상에 내놓는 셈이다. 죽은 다음에, 당신은 살아생전 무엇을 했습니까, 물어온다면 털과 손발톱을 만들었습니다, 라고 해도 될 판이다...” (p.264)


바다를 소재로 그리고 인간을 주제로 다양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문장이 이렇게 좋은 줄을 그간 모르고 있었다. 글을 읽다보면, 아 이거 진짜인 걸, 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 나온다. 우리들 인간의 혹은 우리들 문학의 미욱한 상상을 보전해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아예 섬에 터를 잡고 매일매일을 바다 혹은 바다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작가의 행보는 꽤 믿음직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아야겠다.



한창훈 /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 문학동네 / 347쪽 / 2014 (2014)



ps. 묵직한 사유의 결과물 뿐만 아니라 작가의 글에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주렁주렁이다. 그러니 지치지 않고 잘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 “어떤 배가 베링 해를 지나다 젊은 수컷 물개 한 마리를 잡았다. 잡았다기보다는 어구에 걸려 있는 것을 보트 내려 실어올린 것. 야성이란 사납다. 묶인 것을 풀어주니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들었다. 해구신海狗腎, 세 글자는 떠오르는데 겁이 나서 어느 누구도 잡을 엄두가 안 났다. 누군가 신통한 의견을 냈다. 얼립시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상선은 커다란 냉장 냉동고가 여러 개 있다. 선원들은 봉걸레를 거꾸로 들고 바닥을 두드리며 워이, 워이, 이렇게 몰아서 영하 17도 냉동고에 넣는 데 성공했다. 이틀 뒤, 이제 먹읍시다, 하고서는 문을 열었다. 꽁꽁 얼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팔팔하게 살아서 덤벼들더란다. 영하 3,40도는 예사인 녀석들이라서 그 정도 온도로는 끄떡없었던 것. 되레 더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봉걸레 자루 들고 워이, 워이, 보트에 몰아넣어서 바다에 놔주었단다. 선원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pp.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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