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보다 더욱 유효해진, 비문학적인 것에 맞서는 시인의 (인)문학적 사유
책은 올해 열화당에서 나온 세 권짜리 이성복의 저작물들 중 하나이다. 이 책 《고백의 형식들》은 미발표된 글, 미간행 글, 간행되었으나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글들로 엮은 산문집이다. 나머지 두 권 중 《어둠 속의 시》는 7,80년대 미간행 시들을 묶은 시집이고, 《끝나지 않은 대화》는 이성복의 대화들을 모아 놓은 대담집이다. 이성복의 시와 산문을 읽으며 즐거움을 느끼는 타입인 나로서는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은 책들이다.
“... 시를 만나게 된 다음부터 관념의 색다른 음료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시가 온통 관념의 음악으로, 성스러움을 찾던 내 갈증을 적셔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공정함’이 내가 혼자 있을 때 뒤안으로 나를 불러내어, 시를 좋아하되 신앙하지는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근거 없는 시, 땀에서 흘러나온 시가 아니면 짓무른 감정과 동경으로 썩어 없어질 테니까요...” (p.57)
운이 좋아 살아있음을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살아있음을 굳이 증명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시점과 맞닥뜨리게 되고는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왠지 억울하다. 어째서 나는 살아 있다고 크게 외칠 수 없는 것인지, 어째서 나는 의료사고의 피해자처럼 그 피해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인지... 어쩌면 이성복은 그러한 시점에 이러한 책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째서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하는 반어의 물음과 함께...
“... 형은 ‘시는 무엇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우선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대한 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세계 속에 묶여 있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의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어떤 사변적 논의도 정당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pp.63~64)
꽤 긴 시간동안 (책의 후미에 있는 일기글을 제외한다면 정확한 글의 연대가 적혀 있지 않아 조금 불편하다. 대략 등단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 그러니까 대략 사십여년 동안 쓰여진 것들일 터이다.)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글들은 여러 형식을 가지고 있다. 미완성의 소설이 있는가 하면, 편지글이 있고, 일기글이 있다. 글들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문학을 대하는 특히나 시와 맞서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 글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 나는 어떤 의미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건너뛰며 사유한다.... 나는 분위기에서 분위기로 건너간다. 그러므로 말과 말 사이의 논리적 연관에 대해서는 그리 개의치 않는다...” (p.89)
80년대, 노동문학이나 민족문학이 노기를 띨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작성된 글에서는 그쪽 진영의 어쩔 수 없이 편협하였던 문학관에 대한 반발심이 눈에 띈다. 더불어 그러한 문학관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품고 있었을 법한 억울한 심기도 종종 발견된다. 그 억울한 심기가 불편하게 상대를 튕겨내는 대신 스스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상대방이 튕겨나가도록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타의든 자의든, 세계화 시대에 (인)문학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세계화에 의해 강요된 죽음과 맞서는 (인)문학의 전략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단한 비극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일전에 무명의 네티즌이 올린 동영상은 풍부한 교훈을 준다. 거기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다람쥐 한 마리가 배때기가 뚱뚱 부어올라 동작이 굼뜬 살모사를 사정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뱀은 몇 번 구역질하다가 급기야 무언가를 토해 놓고 도망쳐 버리는데, 주어진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어미 다람쥐의 새끼라는 것이었다. 세계화 시대이 (인)문학과 관련하여, 이 에피소드는 다음 두 가지 차원으로 읽힌다. 세계화라는 독사로부터 (인)문학은 인간을 지켜 줄 힘이 없다. 그러나 (인)문학의 사투는 절명한 인간을 토해내게 할 수는 있다. 혹은 세계화의 포식으로부터 인간은 (인)문학을 지켜낼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저항은 죽어 버린 (인)문학을 토해내게 할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pp.158~159)
열화당의 이번 책들이 나오기 전까지 모두 여덟 권의 시집과 네 권의 산문집을 내는 동안 작가가 유지하였을 (인)문학적 사유의 근간을, 이번 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근래의 전세계적 변모의 정황을 살펴보자면, 그의 이러한 사유를 단순히 문학 지상주의자의 그것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리고 시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넘치는 지금 (어쩌면 시를 없애야 비로소 살 수 있는 세상인 것은 아닌지...), 한결같이 비문학적인 것의 위협에 맞섰던 시인의 저항은 과거보다 더욱 유효한 것이 되고 있다.
이성복 / 고백의 형식들 :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 열화당 / 255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