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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용규 Mar 02. 2020

첫 롤

기다림의 즐거움.


Kodac color plus 200 sketch


여유롭다 못해 따분한 일요일.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선물 받은 필름 카메라가 생각났다. 80년대에 생산된 카메라이니 설명서는 따로 없었기 때문에 검색과 유튜브를 통하여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필름을 카메라에 끼우는 방법부터 초보자들이 하기 쉬운 실수 등을 주로 보았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필름을 끼우자마자 호기심에 가득한 나는 바로 셔터를 눌러보았다. 철컥 에 가까운 기계적인 찰칵 소리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검지 끝으로 전해지는 느낌은 내가 마치 전문적인 사진작가가 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매력적인 소리와 느낌을 전해준 나의 첫 롤, 첫 사진은 나중에 보니 빛이 들어가 버렸다. 필름을 끼울 때 첫 부분은 빛에 노출이 되기 마련이니 이런 경우가 흔히 일어난다고 하는데 난 오히려 이렇게 타버린 듯한 사진이 매력적이고 좋았다.



빛이 들어간 첫 롤의 첫 사진



셔터가 내는 소리와 느낌에 매료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집을 나섰다. 늦은 오후가 되니 해도 어느덧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진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석양이 지기 전 노르스름한 그런 빛이 이쁘게 담길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에 대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걸으면서 여기저기 뷰파인더를 통해서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찍어대다 보니 필름 한통의 36컷은 생각보다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디지털카메라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오히려 굉장히 적다고 생각했다. 한통에 4천 원이 넘는(이때까지만 해도 4천 원이었지만 지금은 7천 원 이상으로 가격이 상승하였다.) 필름이 이렇게 빠르게 찍는 게 너무 아까웠고, 아까워서라도 한컷 한컷 소중하게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색다르게 느낀 점이 또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마지막 36컷을 찍는 순간까지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많이 변했다는 것이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동네 구석구석 들여다볼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이 아닌 재개발을 통하여 어릴 적 골목의 추억들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들이 뷰파인더를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릴 적 추억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지만, 그런 순간을 담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에 씁쓸한 만족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버리는 골목길


그렇게 추억들로 꽉 채운 필름 카메라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예전같이 디지털카메라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바로 확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적으로 집과 가까운 사진관을 찾거나 입소문이 난 사진관을 찾았다.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진관이 있었지만 첫 롤에 대한 궁금한 마음이 커서 가장 가까운 사진관을 선정했다. 그렇게 다음날 오픈 시간에 맞추어 방문을 하여 생애 첫 필름을 맡기게 되었다. 가장 긴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요즘에는 필름을 맡기면 특별하지 않은 이상 3~4시간 후에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간 조차 디지털의 빠름에 익숙해진 나는 느리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 어떻게 찍혔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푼 기분 좋은 기다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진 파일을 전송해준다는 알람을 받고 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요즘에는 현상을 하고 사진을 따로 인화하지 않고 컴퓨터로 스캔을 한 사진을 파일로 보내준다. 기대감에 부푼 나는 잽싸게 사진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마음에 드는 사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진들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찍혀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다던가 흔들렸다던가 하는 아주 기초적인 문제들이었다.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마음에 들게 나온 사진도 역광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 놀던 아주 작은 주차장이다. 줄넘기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고 겨울이면 눈사람도 만들었던 소소한 추억이 있는 공간이다. 사진에는 한줄기 빛으로 아주 작게 나왔지만 이런 사진이야 말로 필름 카메라가 줄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 카메라는 어떻게 보면 요즘 세상에서 사용하기 굉장히 불편하다. 초점이며 셔터스피드이며 찍는 사람이 하나하나 수동으로 조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순간의 찰나를 놓칠 수 있다.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기다림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단점들이 바로 장점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오래되고 칭찬이 자자한 물건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모든 단점들이야말로 아날로그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기 때문이다. 편지와 e-mail이 다르고, 연필과 샤프가 다르며, CD로 듣는 음악과 스트리밍 서비스로 듣는 음악이 다르듯 필름 카메라는 나름대로의 아날로그적 감성이라는 장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릴 적 뛰어놀던 작은 공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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