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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용규 May 15. 2020

창과 방패


얼마 전부터 자꾸 눈에 띄는 것이 생겼다.

흔하디 흔해서, 편의점에서부터 대형마트에 이르기까지 쉽게 찾을 수 있다. 친구를 만나러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도 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낚시를 하러 간 바다에도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제주도의 깊은 산속에서도 볼 수 있다.


올해부터는 건강을 생각해 입에 달고 살던 담배를 많이 줄였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 갑에서 한 갑 반, 그러니까 20개비에서 30개비 정도 태웠다. 지금은 한 달에 15개비 미만으로 태우고 있다. 평균 30분마다 한 개비씩 태우던 간격을 34시간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내가 건강에 이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가 아니다. 의지력이 강하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피웠던 상당수의 담배꽁초를 길 위에 버렸다는 것이다.


방패

사진을 취미로 하다 보니 국내, 외 사진작가들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들을 찾아보는 편이다. 그러던 중 내 가슴에 크게 와 닿았던 사진이 있다. 크리스 조던의 작품이다.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죽어서 뼈만 남은 사진인데, 가운데에 온갖 플라스틱이 가득했다. 그 새는 살아생전에 플라스틱을 먹이인 줄 알고 착각하여 먹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채가 한둘이 아니었다. 태평양의 미드웨이라는 섬에는 이런 식으로 발견된 사체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크리스 조던은 사진을 통해서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차를 몰고 서해의 선재도나 영흥도 쪽으로 낚시를 하러 간다. 길이가 4m 정도 되는 흰색의 긴 낚싯대에 납으로 만들어진 추를 달고 바늘에 갯지렁이를 끼운다. 채비가 끝났으면 깊은 수심층을 공략하기 위해 낚싯대를 던지는, 캐스팅을 한다. 보통 70~80m 정도 추가 날아가서 바닥에 가라앉는다. 운이 좋아서 손바닥 만한 작은 고기들이 잡힐 때도 있는데 방생을 해준다. 운이 좋지 않을 때는 바닥의 돌이나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걸려서 낚싯줄이 끊어질 때가 있다. 자주 있는 일이다. 많을 때에는 무게추를 10개 챙겨가면 10번 모두 끊길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자연스레 바다에 납으로 만들어진 무게추와 낚싯바늘을 고스란히 버리게 되는 셈이다. 썰물이 되어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면 회수되지 못한 엄청난 양의 낚시 쓰레기들을 마주하게 된다.


방패

아주 마음에 드는 배우가 있다. 류준열. 응답하라 1988, 독전, 트레블러 등등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너무 재미있게 보았고 중저음의 목소리에 더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단순히 연기력뿐만은 아니다. 더 마음에 든 점은 요즘 그의 행보이다.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환경적인 문제를 개인 sns상으로 이야기를 하더니, 나아가 그린피스와 협력하여 환경 캠페인을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용기내 캠페인이다. 마트나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할 때 불필요한 포장재나 플라스틱을 줄일 수 있도록 집에서 상품을 담을 수 있는 용기를 미리 준비하여 담아오는 것이다. 상품을 담을 용기를 내미는 것과 이런 행동을 함에 있어서 거리낌 없이 용기를 내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언어유희라고 생각한다.


나의 본업은 공간 디자이너다. 기존에 다른 용도로 사용된 공간이라면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내 의도에 맞춰서 비워 낸 후 다시 디자인을 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난 아주 많은 양의 쓰레기를 발생시킨다. 줄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정도의 양은 분명 발생한다. 쓰다 남은 석고보드, 페인트, 목재, 플라스틱 등등 많은 종류의 쓰레기를 분류하지 않고 자루에 몽땅 담아버린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또 이렇게 많은 쓰레기를 버렸구나... 이 쓰레기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잠깐의 죄책감은 전화 한 통에 달려오신 폐기물 사장님의 트럭과 함께 말끔히 사라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방패

새로 산 필름 카메라를 들고 테스트를 해볼 겸 빠르게 을지로를 한 바퀴 돌면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을지로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뭔가 자꾸 불편했다. 좋은 것들만 담고 싶었는데 카메라 뷰파인더로 좋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이 보였다. 을지로는 대로보다 골목골목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어느 순간 쓰레기와 담배꽁초 천지가 되었다. 금연 표시와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 심지어 부탁을 하는 문구도 보았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는 듯 바닥에는 역시나 쓰레기와 꽁초가 가득했다. 좋은 것만 찍어보려 했던 나는 이 순간 완전히 마음이 바뀌었다. 우리의 양심에 대해서 찍어보기로.


요 근래 이런 창과 방패의 대결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코로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말이다. 비위생, 오염, 바이러스로 인해 코로나가 발생하여 인간이 피해를 입고 있는 중이다. 반면 확산을 막기 위해 인간의 발길이 뜸해진 곳은 다시금 생태계가 좋아지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창일까 방패일까?”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쓰레기를 줄여보자라는 방패의 마음은 크지만 막상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쓰레기가 발생하는 창의 행동을 하고 있다.


나는 환경운동가가 아니기 때문에 남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환경보호를 권유하거나 외칠 수 있는 입장은 못된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 하나쯤은, 짧게나마 살아온 과정에서 창의 만행을 반성하고 방패의 마음을 실행한다면, 앞으로의 내가 걸어갈 발걸음은 지금보다는 가벼워질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깃털이 오염된 이 비둘기를 보면서 가볍게나마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본인이 창인지 방패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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