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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용규 May 23. 2020

손으로 쓰는 맛.

나의 악필 노트




나는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책상, 카페, 해변가와 같이 장소를 불문하고, 종이와 연필은 가장 간단하고 쉽게 쓸 수 있는 수단이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손에 달고 살지만, 이상하게 나는 종이에 직접 글을 쓰는 것이 좋다. 


노트북으로 글이나 메모를 하려면 노트북을 올려놓기 위하여 책상을 한번 정리해야 한다. 개인 작업실이 아닌 카페라면 적당한 자리를 찾는 것은 필수다. 노트북 덮개를 열고나서 메모할 프로그램이나 창을 하나 띄운다. 목적 없이 기록만을 위한 타이핑이라면 관계없다.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깜박이는 커서를 마주하게 된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다. 겨우 써 내려간다 하여도 무엇을 쓰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어서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제일 별로인 건 아무리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키보드를 골라도, 손가락 끝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물론 손으로 쓰는 것에 비해서 속도는 아주 빠르지만, 퇴고를 하는 순간에는 내 글이 인스턴트의 맛이 묻어 있는 것 같아서 선호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더하다. 뭉뚝한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건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스마트폰으로 글을 쓴다면 어디에서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연습을 해보았지만 오타가 많이 생길뿐더러, 손바닥 만한 화면과 씨름을 한다는 게 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글을 어디에서나 쓰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반대로, 종이에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것은 너무나 좋다. 예전에는 무선 스프링노트에 일기를 아무렇게나 적었지만, 글을 써보기로 시작한 후부터는 컴포지션 노트에 차곡차곡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이, 필기구를 어떤 것으로 쓰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만년필로 글을 쓸 때에는 라미 사파리를 사용한다. EF닙이기 때문에 종이 상태에 따라 반발력은 다르지만, 컴포지션 노트는 아주 기분 좋을 정도의 제어감이 있다. 마치 글을 쓰는 이로 하여금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가며 쓰도록 설계된 것 같은 느낌이다. 반대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부드럽게 쓰고 싶은 날에는 지브라의 sarasa clip 펜을 사용한다. 0.7mm를 사용하기 때문에 굵고 진한 글씨체를 보여준다. sarasa clip 펜을 선택한 날에는 악필 중에 악필이 탄생하는 날이지만 그만큼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빠르게 휘갈겨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아하는 필기구인 연필이다. 브랜드에 상관없이 연필은 사각거리는 소리가 최고다. 주로 HB 심을 사용한다. 연필은 흑심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나무에서 나는 향이 매력적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에 살짝 눅눅해진 노트 위에 연필로 글을 적을 때에는 아주 감성적인 순간이다.


중학교 3학년 시절에 국사 수업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다. 국사 선생님은 다른 과목 선생님들과는 다르게 프린트 자료를 주지 않으시고 칠판에 분필로 수업자료를 다 적어주셨다. 분필로 쓰시는 선생님의 글씨체는 아주 명필이셨다. 우리는 그 내용이 시험문제에 나오기 때문에 한자도 빼놓지 않고 노트에 다 적었다. 이때 우리 반 학생들은 거의다 샤프를 사용했는데, 열심히 받아쓰기를 하다가 귀를 기울여 보면 재미있는 소리가 났다. 모두가 열중해서 적기 때문에 떠드는 아이들도 없고 오로지 책상 위에 샤프심 부딪히는 소리만 나는데, 나는 이 소리가 꼭 된장찌개가 끓는 소리 같아서 흥미로웠다.


물론 글을 손으로 쓴다면 수정하는 과정도 더디고 앞뒤 문맥과의 연계, 새로운 표현의 첨부 등에 있어서는 굉장히 불편하다. 필기구가 너무 부드럽거나 조금이라도 오래 글을 쓰다 보면 손목이 아프기도 하다. 어느 정도 글이 완성이 되었을 때 결국에 노트북을 통해서 옮겨 적는 것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번거로움은 손으로 쓰는 맛에 비할 것이 못된다. 


언젠간 나도 연필로 쓰는 습관에서 벗어나, 노트북을 이용해서 글을 쓰는 날이 올 것이다. 

다만, 난 오늘도 이 글을 노트에 연필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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