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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쓰 Aug 15. 2020

애런 소킨

나를 책임져라 져

1.

지난 일을 잘 기억 못하는 편이다.

이렇게 캐주얼하게 말하기엔 좀 심각해서, 동창들을 만나면 많이 털리곤 한다. 누가 몇 반이었고, 누구랑 친했으며, 그 때 누가 어째서 내가 어쨌는지를 기억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저 신기할 뿐.


되도록이면 있어보이기 위해서,

지금이나 앞일에 집중하는 편이라 뒤는 돌아보지 않아서 기억 못 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런 게 어딨겠는가. 그냥 기억력이 썩은 거지.


2.

그런데도 신기하게 떠오르는 어렸을 때 기억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던가, 영화 [어 퓨 굿 맨]을 엄청 집중해 보고 있었다. 극은 절정으로 치달았고, 기억에 클라이맥스였던 듯 한 탐 크루즈의 구두 변론 장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잭 니콜슨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 엄청난 장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이 때 이후 다시 본 적이 없어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그 때 결심했다, 좋아 나 변호사 할래. 

뭔지 모르지만 말로 누군가를 때리는 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시 동네에서 말발 좀 세웠다는 애기의 패기.


3.

그 전까지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사람이 되고 싶다던 - 기름 냄새와 주유소 왕 같아 보이는 점이 좋았다 - 내 입에서 갑자기 변호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엄마는 뛸듯이 기뻐하셨다. 기름 넣는 사람보다 그럴 듯한 직업이라 생각하셨던 걸까. 그 이후로 약간의 방황도 있었지만 결국 어릴 때 꿈으로 돌아왔고, 변호사가 되었다.

소름..인생 바뀜..

단순히 말하기 좋아한다고 변호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법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 사실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사를 연기하던 배우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결정적으로 초딩에게 장래희망을 묻는 게 얼마나 파괴력 큰 행위인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 후.


4.

첫 직장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들어간 곳에서 3주만에 퇴사한 다음, 백수생활을 보람차게 하는 단 한 가지 행동 - 본 드라마 또 보기 - 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나는 그냥 괜시리 오늘도 뉴스룸을 틀었다. 그러다 문득, 대사 수준이 상당히 높은데 이걸로 공부나 할까, 싶어 대본을 찾던 중 작가 애런 소킨이 쓴 영화와 드라마 대본을 모아둔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것 좀 보세요

아니 이보시오 작가 양반....

당신이 어퓨굿맨도 쓰고 뉴스룸도 쓰고 머니볼도 썼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런 소킨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

...데헷?

이쯤 되면 내 인생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 때문에 얼떨결에 변호사가 된 나는 어쩌죠?

메일 보내야 할 지 심각하게 고민. 


5.

뭐 그건 그렇고,

너무 심심해서 공인중개사 시험이나 보기로 했다.

오늘(8월 15일) 신청했는데 10월 31일 시험. 과목은 총 6개.

어이 없는 게 일단 민법 + 민사특별법(주임법, 상임법, 또 뭐 하나 더 있었음)이 한 과목. 참나.

강남 교보 가서 책 사오니까 딱 하기 싫다. 

...그래서 진영오빠 & 선미가 부르는 when we disco 무한반복하면서 브런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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