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공채 합격 후 펼쳐진 신입사원 수난기
대망의 합격 발표날이 되었다. 전날 밤, 너무 떨려서 잠 못이룰까봐 일부러 친구네 집에서 자고 일어났다.
발표는 오후 2시에 난다던데. 아침 10시부터 입이 바짝 마르고 손에 땀이 찼다.
카페에서 친구를 붙잡고 늘어졌다.
“죽을 것 같아. 떨어지면 어떡해?”
“붙어도 감사하고 떨어져도 감사하다고 생각하자.”
“근데 진짜 떨어지면? 으아아.”
그렇게 친구를 괴롭히길 세 시간 째. ‘안되겠어. 나 자전거 타야겠어.’ 라는 말과 함께, 나는 친구의 어이없는 표정을 뒤로하고 따릉이를 타러갔다.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으면 긴장감에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아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20분쯤 탔을까, 집에 거의 다 왔는데 핸드폰에 문자 알람이 울렸다. 결과 나왔나? 떨리는 손으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자전거가 멈췄다.
'…결과가 발표되었으니 확인하세요…'
아 진짜 왜 나는 지금 자전거를 타고 있는거야.
안장에 걸터앉은 채로 급박하게 채용 사이트에 로그인을 했다.
결과는..
“헐. 합격했어.”
나 소브메. 칼취업하다. 합격이란 두 글자를 보는 순간 머리 끝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 이제 광고인 되는 거? 월급 받는 거?
“멋지다. 나 자신.”
그 때까지만 해도 내게 광고인이 된다는 건, 삶의 목표를 이룬 것과 맞먹는 느낌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광고기획자가 되고 싶었고, 대학 생활 내내 광고 공모전에 절어있었기 때문에, 역시 하늘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구나, 한 우물만 파는 게 답이구나 싶었다.
합격의 달달함도 잠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얼른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취뽀했어.”
“취뽀가 뭐야?”
“광고회사 취업했다고!”
“아~ 오늘 발표였어? 장하다, 우리 딸.”
“응 이제 아빠한테 전화할게.”
왠진 모르겠지만 난 엄마한테 먼저 소식을 전하는 습관이 있다.
“어 아빠, 나 취뽀했어!”
“취뽀?”
“취업 뽀갰다고. 나 합격했어.”
“출근은, 언젠데?”
“내년 1월. 앞으로 한 3개월정도 자유 시간.”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네, 수고했다.”
생각보다 덤덤한 엄마 아빠의 반응에, 두둥실 떠올랐던 내 마음도 중력에 이끌리듯 내려와 잠잠해졌다.
그리고 빠르게 다음 고민이 머릿 속에 자리잡았다. 3개월동안 뭐하지? 행복한 선택지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나는 결국 여느 시간부자들처럼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란 마음이 분수에 걸맞지 않은 충동을 합리화했다.
어차피 나 이제 돈 벌 거니까, 몇 개월치 월급 미리 당겨쓰면 되지.
이 생각에 약 한 달 간의 유럽여행이라는 사치의 사치를 부렸다.
여행의 단 맛을 똑 떨어뜨릴 덜덜한 사건들이 날 기다릴 줄도 모르고.
“내 난생 너 같은 신입사원은 처음 본다. 회의에 아무 것도 안 들고 와?”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도 밤을 새서라도 해왔어야지!”
한심하다는 듯 나무라는 말투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푹, 하고 꽂힌다.
하필이면, 나의 첫 사회생활은 말랑한 꽃밭이 아닌 날카로운 가시밭이었다.
진짜 이상해. 업무 시간 안에 다 할 수 없는 일이라 못 했는데 왜 화를 내지? 일을 하나씩만 주든가….
“제가 그래서 어제 못 해갈 것 같다고 사수님께 말했는데요..”
“나는 그래도 너가 생각은 해본다길래 해오는 줄 알았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으악. 또 소리 지른다. 내 편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 나는 깨지고 또 깨졌다.
억울했다. 야근 수당도 안 주면서 야근 시키고, 제 시간에 절대 해올 수 없는 분량의 일을 고작 3개월도 안 된 신입사원에게 떠넘기는 게.
이걸 해내는 게 열정이라고? 웃기는 소리. 돈 받은만큼의 열정은 오늘 다 소진했는데요.
아이디어는 쥐어 짜면 나오는 게 아닌데 왜 자꾸 야근만 시키면서 생각을 해오라는 거에요.
목구멍까지 말대꾸가 차올랐지만 여기는 회사니까,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니까, 꾹 꾹 화를 눌러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일까지 시간을 주시면 꼭 해올게요.”
“내일 아침에 다시 회의 해.”
날선 말들의 폭격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며칠 째 이런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며칠 전에 야근하면서 내가 언제 퇴근할 수 있냐고 물어봐서 그런가.
그 때부터 찍혔나.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 할 건 많은데, 머리가 어지러워 집중이 안됐다. 불안함과 불편함이 회사 안 공기를 가득 메웠다.
내일 회의 준비 해야 하는데. 나 때문에 하루 미뤄진건데. 근데 아무 생각이 안 나….
그 상태로 새벽까지 회사에 있다 막차를 탔다.
이미 오늘 한 업무만으로도 소진될 대로 소진된지라 내일 회의 준비를 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일도 아무것도 안 가져가면 진짜 아웃일텐데. 무서웠다. 인정받지 못하는 신입사원이 된다는 게.
꾸물 꾸물 버스 안에서 노트북을 켰다. PPT를 열어, 좋은 아이디어든 나쁜 아이디어든 생각 나는 모든 것을 타이핑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장표를 만들었다. 얼추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다섯 시였다.
출근하려면 앞으로 두 시간밖에 못 잘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내일은 혼나지 않겠지.
그 생각에 두 시간이라도 맘 편히 잠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