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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브메 Dec 07. 2023

매운 책임감

역지사지의 힘

2년정도 일하게 되니 어느정도 일이 손에 익었다. 그리고 팀에 인턴도 생겼다.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은, 총 세 명.


첫번째 인턴이 들어왔다. 요즘 취업난을 대변이라도 하듯 너무 좋은 학교에 다니는 고스펙자였다. 마침 팀에 중국 클라이언트가 있었을 때였는데, 중국에서 살다온 경험도 있는 분이었다. 그럼 적어도 파파고를 돌리는 시간이 나보다 짧겠지?


“와, 그럼 혹시 중국어로 ‘젓가락’은 뭐라고 해요?”

“...”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내가 어딘가에 뽑혔을 때 ‘이 정도는 하겠지’라고 기대했을 분들의 마음을 떠올렸다.

 

첫번째 인턴에게는 간단한 번역 업무와 게재 지면 따는 업무가 주어졌다. 그 일을 부탁하며 나는 또 다시 처음으로, ‘왜 처음에는 직무의 본질과 멀리 있는 업무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지’ 깨달았다. 그건 ‘우리 팀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세요, 그리고 너무 바쁘니 두 번 볼 일 없게 작은 일을 확실히 처리해주세요.’라는 메시지다.


첫번째 인턴은 한 달만에 그만뒀다. 다른 더 좋은 기업에 합격했다고. 아쉽지만 축하하는 마음으로 두번째 인턴을 뽑았다. 두번째 인턴에게는 자료조사와 아이데이션 업무가 주어졌다. 우리 업계에 관심이 많으니, 최선을 다해주겠지?




인턴의 업무를 내가 한 땀 한 땀 수정해야 할 때가 오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이것까지 일일히 손봐야 하나 싶어 스트레스가 밀려오곤 했다. 그래도 초안을 대충이라도 만들어두는 것이 업무 효율이 좋았다. 혹시 몰라 아이데이션도 부탁하게 됐다. 진짜 혹시,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있으려나 싶어서.


“기획서 어디있어요?”

“노션으로 써왔어요.”


노션, 입사 후 처음 보는 툴이었다. 불필요한 장표도, 이쁜이 작업도 없는 날 것의 논리 그대로를 단 몇줄로 요약해온 기획이 눈 앞에 보였다. 당황스러웠지만 설명을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당장 얼터 안으로 써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예전에 그 분들은 나를 헛고생 시키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랬구나….


“퇴근 시간에 미안한데 자료 조사 9시까지만 같이 해줄 수 있어요?”

“...네.”


이 아쉬운 소리를 내가 하게 될 줄도 몰랐다. 나도 집에 빨리 가고 싶은데, 혼자 하면 새벽에 갈 것 같고 둘이 하면 그래도 12시 전엔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염치없이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이었다. 분명 4시 쯤엔 혼자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다보니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퇴근시간에 임박하게 되는 거였다. 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바삐 일하고, 함께 야근하다보니 묵묵히, 열심히 임해주던 두번째 인턴의 계약기간이 끝났다. 그리고, 세번째 인턴을 맞이하게 됐다. 나보다 더 광고를 좋아하는 친구처럼 보였다.





“기획서 써본 적 있어요?”

“공모전 해봤어요.”

“그럼, 이번 PT에 같이 참여하면서 기획 방향성 하나 잡아볼래요?”


이 친구는 내 말 한마디에 밤을 새려나, 미안하지만 밤을 새주면 좋겠다. 아니, 이러면 안되지. 인턴인데. 그래도 방향성을 하나 들고와주면 좋겠다. 아니, 이러면 안되지.


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이 사람에게 매운 책임을 지울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조심스럽고, 주저됐다. 하지만, 혹시 몰라, 설령 잘 못하더라도 열심히 피드백을 주면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다음 날, 회의실에서 다시 만났다. 이제껏 인턴에게 받아본 것 중 가장 준수한 기획서였다. 여러 기획서를 베끼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열심히 알려주게 됐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돼….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그니까 앞으로는 WHY?를 파고 들어서 진짜 문제를 찾고, 그 해결의 KEY를 도출하는 장표를 넣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노력해준게 고마워서, 그리고 뭐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회의실에서 몇 십분을 붙잡고 피드백을 줬다. 인턴은 내게 고맙다고 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과거 갖지 못했던 마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관심도 없으면 피드백조차 주지 않을 텐데, 피드백을 줬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네가 그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너무 상처 받지 마.’


그냥, 표현 방식의 차이였을지도. 나를 위해서 했던 말들일지도. 이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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