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이 없었다
어느날, 내 시간이 내 시간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대로 여행도 못 가. 취미생활도 못 해. 주말도 보장할 수 없네.'
언제 경쟁PT가 잡힐지 모르고, 언제 광고주가 업무를 요청할지 모르니. 내 일주일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었다. 그 날은 그것이 특히나 더 무력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홧김에 한 번 이직을 포기했었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또 다시 이직의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행동이 빠른 편이라, 평소 좋아했던 브랜드들의 채용공고를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자격요건에 부합하고, 평소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던 브랜드의 마케터 채용공고가 있었다.
그 채용공고를 보자마자,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이 자기소개서를 써내려갔다. 포트폴리오는 틈틈히 만들어두고 있었기에, 최종 지원까지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언제 면접 연락이 올지 몰라 자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지원만 한 것 뿐인데도 왠지 모르게 팀원님들께 죄송했다.
'막내가 딴 생각 품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대이직의 시대라던데, 그 물결에 한 템포 빠르게 올라타보고 싶기도 했다.
점심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면접을 보러 오란 전화였다. 이렇게나 빨리 연락이 오다니! 나는 놀란 마음을 감추고자 침착한 목소리로 면접 일정을 잡았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면접이 진행됐고, 한 시간짜리 면접이라더니 30분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무수한 검색으로 마주했던 분들이 면접관이라니. 떨렸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해간 발표를 마쳤다. 후일담이지만 이직한 회사의 팀장님은 날 보고 ‘이 미친 텐션은 뭐지?’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이직에 성공하게 되었다. 면접 바로 다음 날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고, 그 다음주에 연봉 협상을 진행했다. 남은 건 이직을 통보하는 일 뿐이었다.
많은 고민이 있었다. 나를 믿어주시는 분들에게 배신감이 들 만한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다. 나같은 유리멘탈에겐 너무 고난이도 미션이었다. 그래서 며칠 간 잠도 자지 않고 퇴사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떨지 말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거야.
“제가 너무 좋아하는 브랜드라서요. 그 곳에서 브랜드 마케터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원래는 할 말이 많았는데, 결론은 이거였다. 나는 한 시간 넘게 나의 비전을 말씀드렸고, 요약하자면 ‘지금 이직하면 넌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는 식의 확신을 뒤흔드는 질문 폭탄을 받았다.
결국, 나도 단호하게 의사를 전달 드리게 됐다.
“아무래도 제 비전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아요.”
나의 그 말을 끝으로 ‘알았다’ 는 대답과 함께 퇴사 면담이 끝났다.
‘죄송합니다.’ 와 같은 말들은 마음 속에 묻어두었다.
내 인생에 대한 선택인데 죄송한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