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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 Jun 15. 2023

당신의 유월은 안녕하신가요?

정말 그런 세상이 올까? - 바니타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리 정말 오랜만이죠.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마지막 편지에서 이제 봄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벌써 여름이 코앞이에요. 사실 6월 말이면 초여름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날이 좋으면 재미있는 공연 한 작품을 보고 근처 공원을 시원한 음료와 함께 걷는 게 딱 어울리는데, 오늘 선생님께 소개하고 싶은 은수는 여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랍니다.     



아직 공연 일정이 남아있는, 괜찮은 공연을 소개해드리고 싶다는 룰을 깨고 싶지 않아 그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어요. 공연을 보러다니지 않은 건 아니지만,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보거나 공연을 봐도 만족하지 못하고 나왔었어요. 시간과 마음을 들여 공연장에 갔다가 기분이 별로인 채로 나오는 것도 좋지 않지만, 그 시간을 복기하며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별로일 것 같아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어요. 보고 싶었답니다.   

  

은수는 ‘바니타스’라는 연극에 나오는 등장인물이에요. 이 연극은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며 보여주는데, 은수는 복원가에게 윤지호 화백의 자화상 복원을 의뢰한 국회의원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복원가 앞에 갑자기 1996년의 윤지호가 나타나게 됐어요. 그는 1997년에 죽은 화가인데도 말이에요. 이 연극은 이렇게 시작해요. 윤지호 화백의 기억 속에 있는 은수는 운동권 대학생인데, 선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꺾이지 않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약한 것 같아요. 얼마 전 sns에서 그런 글이 유행을 했어요. 악한 부부는 궁금하지 않지만, 그 부부 아래서 자라 선하게 큰 아이의 이야기는 너무 궁금하다. 어떠세요? 선생님도 그러실까요? 저는 세상을 움직이는 건 결국 선한 어떤 의지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은수는 저에게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은수는 선하고 무른 성격의 아버지로 인해 어린 시절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일이 생겼어요. 보통 이런 서사는 악당의 전사로 많이 이용되는데, 은수는 그럼에도 선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정하죠. 물론 이건 제가 관람했던 회차의 배우가 갖고 있는 성질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은수는 결국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는 지호를 세상 밖으로 꺼내옵니다.      


미술품 복원이라는 이야기가 주된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에 있는 지호와 은수의 치열했던 20대를 바라보고 있자면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죗값을 수많은 은수들이 치러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은수와 지호는 다툼이 생기고, 은수가 지호를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가 죽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호는 대한민국 미술사에서 다시없는 팝아트 화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죠. 요절한 천재 작가, 잘 팔리는 타이틀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지호가 그린 유일한 자화상이 경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은수에게로 오게 돼요. 그 그림은 지호에게도, 은수에게도, 예준에게도 큰 의미였고 의미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최대한 가려보았어요. 하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호와 은수의 관계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거예요. 모처럼 가볍지만 가볍지 않게 볼 수 있는 좋은 연극이었어요. 당신에게 은수는 어떤 인물로 다가오게 될까요. 선생님께서 이 연극을 보게 된다면 꼭 편지해 주세요. 당신에게 은수는 어떤 인물일지, 그리고 또 다른 인물을 사랑하게 되신다면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요.     


또 편지할게요.

무더운 여름입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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