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 Mar 02. 202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지만 거기가 지옥은 아니다


에세이를 다시 써 보자고 다짐한 건 브런치 어플의 알람 때문도 아니고, 누군가의 충고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이다. 말 그대로, 그냥. 에세이를 다시 써 보자고 다짐한 건 ‘그냥’이었지만, 글을 다시 써 보고 싶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글 쓰는 일이 업이 되면서부터였다. 나는 꽤 오래 학교에서 근무하다 학원 쪽으로 이직하게 됐는데, 첫 학원에서 특목고와 자사고 진학을 꿈꾸는 친구들의 자기소개서 수업을 담당하게 됐다. 다음에 언제 한 번, ‘일이 힘들어도 상사 복은 좋았다’는 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할 날이 오겠지만, 이 직장 역시도 내게 일은 힘들지만 상사 복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방점이 이번에는 뒤가 아니라 앞에 찍혔다는 게 문제지.


매번 정해진 교재가 있고, 명확한 결과물을 내기 위한 수업만 해 본 나에게 ‘자기소개서 수업’은 어렵고, 힘든, 그러니까 정신 노동 중에서도 고강도의 노동에 속하는 일이었다. 커리큘럼이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이마다 쓸 수 있는 소재의 수준이 다르고, 당장 쓸 수 있는 소재도 그 깊이가 달랐다. 수업 준비도 어렵다.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첨삭’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의 형태도 아이마다 달랐다. 어떤 아이는 6주 만에 절반을 완성했고, 어떤 아이는 6주 동안 한 문단도 완성하지 못했다.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학부모를 만난다면 정말 행운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비용이 비싼 편에 속했기 때문에 강사를 향한 폭언이나 신경질을 당연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를 만날 때면 한숨이 나왔다. 학부모에 대한 미운 마음이 생기면 아이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럴 땐 종종 상담이라는 명목 하에 3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풀이를 들어주어야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온통 불확실한 말 뿐이었다. 가끔은 턱끝까지 ‘아, 그럼 본인이 집에서 쓰세요’ 라는 말이 올라오지만 나는 경영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참다 참다 한 번 정도는 그렇게 내질렀더라도, 다음엔 그러지 말라는 말 정도로 끝낼 상사를 두긴 했지만……. 내 자존심 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자존심.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8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도망치는 거라고 해도 좋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겠지만, 적어도 지옥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다.


마지막 수업을 앞둔 평일이다. 학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주말은 온전히 학원의 것이 되었고, 평일 오전과 며칠 간의 평일 휴일이 주어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편이라 오전에 실컷 잘 수 있는 건 좋았고, 한산한 평일의 휴일도 만족스럽다. 남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것을 창밖으로 보면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일이 얼마나 그 순간에는 만족스러운지 모른다. 여유가 필요하니까 여유를 가장하면서도 즐겁다. 아, 여유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구나. 어느 평일에 문득 그걸 깨닫고 나서는 트위터에서 읽었던 ‘사람에게는 하루에 쓰고 읽을 수 있는 글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출처 모를 글에 속으로 공감을 표하게 된다. 나는 여유가 없었구나, 나는 글 쓰는 일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 일이 주 업이 되었는데 왜 불행한 거지? 나를 위해서, 또 내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퇴사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부터는 기회만 닿으면 도망갈 궁리를 했다. 그리고 토끼 굴을 하나 더 파게 되었다. 영리한 토끼는 아니라서 세 개나 파지는 못했지만, 하나면 됐다. 이제 나는 도망갈 것이다. 생각보다 ‘내 글을 쓰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게 해 준 첫 경험에 감사를 표한다. 어쨌든 사람은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니까, 이번 주에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마주할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 쓰는 취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