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어려운 서른이라니
좋아하는 것이 워낙 많다 보니 종종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뭐,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는 것을 함의한다면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교사로 재직하던 때에는 아이들을 정말 많이 사랑했다. 사랑하는 만큼 미워해서 애증 관계인 아이들도 많았다. ‘선생님은 어떻게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어떻게 애들한테 ‘내새끼’라고 부를 수 있어?’라고 묻는 선생님도 계셨다. 멋쩍은 듯 웃으면서 ‘1년만 제 새끼죠 뭐’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정말 그 일 년 뒤에는 다음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그들이 ‘내 새끼’였던 순간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그리고 내 글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의 고양이들을 사랑한다. 누군가를 향하는 감정에 명확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는 내 고양이들로부터 축복받은 운이 좋은 인간이다.
어쨌든, 이렇게 사랑은 많지만 애석하게도 연애라는 건 늘 어려운 주제다. 키스나 섹스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연애라는 단어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전적 정의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아는 단어이기에 생략한다고 할 수 있지만, 검색 포털에 검색해 보지 않고 그 뜻을 말해 보라고 하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럼에도 연애는 꾸준하게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100일 넘긴 상대가 없었지만, 어쨌든 20살 초봄까지는 꾸준히 연애를 했었다.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교회 오빠, 기숙사 친구, 아는 동생의 친구, 운동 선수……. 그런데 그들의 이름조차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름이 조금 독특했던 사람은 명확하게 기억나는 편이긴 하지만, 그게 아닌 사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력이 그다지 나쁘지 않음을 생각해 본다면, 별로 기억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기에 그렇겠거니 한다. 그리고 나는 21살 때부터 꽤 오래 한 사람을 만났다. 5년, 아마 그 정도 만났을 것이다. 헤어지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린 사람이다. 울고 불고, 서로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를 수십 번 반복해서가 아니라 내가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1년 정도였다는 말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그 영화의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든다. 헤어짐에는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 연애 다음에는 몇 번의 소개팅을 했다. 너무 어릴 때 그 사람을 만난 덕분에 미팅이니 소개팅이니 하는 것은 한 번도 대학 시절에 해 본 적이 없으니, 사실상 생애 첫 소개팅이었다. 그런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같은 직종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아예 다른 직종의 남자를 만나 봤다. 더 재미가 없었다. 그냥 나는 연애 그 자체에 질려버렸나 보다,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지금은 대강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냥 그들이 재미가 없었던 거다. 물론 그들에게 나도 재미없는 사람이었겠지.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나니까 요즘은 그냥 받기만 하거나, 주기만 하는 사랑의 형태에 좀 더 익숙해졌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애에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버린 건, 그냥 일어난 일이니까. 누가 했던 말처럼 그냥 사랑이나 하면서 살아야지, 연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