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은 사실 참 이상한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후 여러 차례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그 결과 페미니즘의 본래적 의미에 비추어 본다면 이 질문이 결국 여자에게 "당신은 여자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이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 제가 잘 이해를 못 해서요. 생각하시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설명을 듣고 나면 그에 맞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의 의도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이처럼 말이라는 것은 그것의 사전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 상황 속에서 또 다른 맥락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니 같은 단어일지라도 예전에는 새로웠던 말이 지금은 시대에 전혀 맞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던 것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이런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전적 의미와 맥락적 의미 중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말하거나 들으면 당연히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분명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누군가 다르게 이해하거나 좋지 않게 받아들인다면 그 이유를 보다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당연히 어떤 경우에는 말하는 사람의 잘못이었을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듣는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한 개인이 다수를 상대로 말을 할 때에는 상황이 좀 더 복잡해진다. 이는 한 사람이 다수의 상황과 다수의 맥락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 싫다면 말하는 사람이 더 주의할 수밖에는 없다. 개인 대 개인으로 이야기하는 상황이라면 위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예와 같이 더 자세히 대화해 풀어나가면 되지만 다수와는 일일이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에게도 개인에게 하듯 말하고 싶다면 그로 인해 수반되는 것들은 감수해야 한다.
조금씩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 갈수록 사회의 변화는 참 빠르고 그 구조도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를 자주 느낀다는 건 나 역시도 주로 끌고 가던 입장에서 따라잡는 위치로 물러나고 있다는 뜻일 테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계속 능숙해지는 부분이 있는 반면 갈수록 낯선 것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단지 앞서 말한 말과 글뿐이겠는가. 하루하루 수도 없이 새롭게 생겨나는 상황과 사정들 속에서 섣불리 무조건 옳다고 말하기도 또 완전히 그르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경우들도 생긴다.
이런 빠른 변화와 복잡한 상황에서 나는 어떤 유행의 겉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의 속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좀 두렵다. 젊음은 결국 사라질 것이지만 아마도 나름의 매력만은 길게 가져가고 싶은 욕심이 있나 보다. 또 겉이 주는 매력은 속이 주는 매력보다 절대 길게 갈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것을 그동안 나 자신과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니 결국에는 앞으로도 어떤 부분에서든 낮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 같다. 그래야만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나는 생각이나 관점, 맥락들을 맞이하고 배워가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