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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 Jun 28. 2020

나와 당신 사이의 균형

마흔 살 기념 글

  한참 길게 느껴졌던 십 대 시절을 보내고 드디어 스무 살이 되자마자 다짐했다.

  ‘이제부터 하루하루 더 성숙해져야지. 내 성격의 단점을 다 고칠 거야.’

  그럴 만한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정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진입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 같다. 집, 학교, 학원, 독서실 사이를 오가며 가족, 선생님, 친구들만 만나는 그런 시기는 끝내야 한다고 봤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을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후 최대한 많은 경험과 또 많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용기를 내어 하나를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을 만나면, 또 다른 경험과 관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명의 동기와 대화하고 가까워지니 곧 또 다른 친구들이 생겼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도 함께 하는 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니 국제 봉사 캠프에도 참여하게 되어 해외에 발을 딛게 되었다. 지역의 동문회에도 나가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심지어 랜선을 통해서는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 대화를 나누 실제로 만나기도 했다. 뭐든 직접 몸으로 부딪쳐 겪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모르는 것이 많은 만큼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아주 용감했다. 또 희망찼다.


  시간이 더 흘러 이십 대 후반을 지나 삼십 대가 되었을 때에도 그런 나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때부터 겪게 된 삶의 색깔은 달라졌다. 부모님의 경제적 울타리와 학생이라는 신분 안에서 주로 돈을 쓰며 하는 경험과, 본격적으로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내가 선택하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로 밀어닥쳐 오면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힘들고 어려워도 닥치면 해 내야 했고 뭔가 불편한 사람도 계속 만나야 했다. 어떤 사람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껴 계속 같이 지내고 싶으면 원치 않는 다른 관계까지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렇게 부딪쳐서 생기는 상처의 크기도 전과는 달리 이제는 제각각이었다. 그 숫자도 점점 늘어 갔다. 그 결과 고치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성격의 단점들은 점점 더 선명히 드러났다. 사람의 본성이란 즐겁고 좋을 때보다 힘들고 바닥을 칠 때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니까.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호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상대의 처지와 마음을 알게 되면 스스로가 괴로워져도 모질게 행동하지 못했다. 부모님께 거역하지 못하는 건 기본이었고 누군가의 부탁도 거절을 못했다. 심지어 부탁을 안 해도 내가 먼저 신경 쓰고 있기도 했다. 모두 다 하기 싫어하는 경우라면 그냥 내가 했다. 서로 감정적으로 불편해지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하고 말아 버다.

  이런 성격이 별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감당할 수 있다면 되도록 잘 지내는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인생에 감당할 만한 상황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운, 극단적인 상황을 겪고 나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각자에게는 홀로 감당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몫이 있었다. 그것은 서로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때로는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낳고 기르고 그 아래서 자란 부모 자식 관계에서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무엇에 계속 눌리고 있었는데 비로소 벗어난 기분이었다. 이제야 조금 더 성숙해졌나 싶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딱 20년의 시간이 걸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한참 걸릴 줄 미리 좀 알았다면 그렇게 급하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 초조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는 좀 덜하지 않을까 싶다. 남은 삶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이제는 아니까. 혹시 중간에 막막한 마음이 들더라도 천천히 계속 가고 있는 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또 이제는 앞으로도 계속 흘러갈 삶의 가운데에 ‘균형’을 둬 보려고 한다. 이상과 한계 사이의 균형, 마음 쓰임과 여유 사이의 균형, 나와 당신 사이의 균형. 애써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건 또 그만큼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는 얘기니까. 그러니 그런 상황을 무조건 거부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때는 나 자신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불균형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있더라. 돌아보니 혼자만 남았거나, 또 자신은 없어져 버렸는데 관계만 남거나. 이제는 그 어느 쪽도 바라지 않으니 앞으로는 기우뚱거려도 계속 중심을 잡고 가 보려고 한다. 그 방법을 찾고 익히려면 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테지만. 또 동시에 어쩌면 둘 중 하나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만 더 빛나는 다정함과 단호함 역시 내 안에 모두 넣어 두고 가져가 보겠다.

40년을 산 지금 마스크와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을 줄이야

매일의 이야기는 @some_dais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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