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덕 Aug 24. 2024

좋은 남친, 좋은 남편 vs. 좋은 아빠

싸이가 ‘강남스타일’ 앨범을 발매하고, 강남 한복판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열었던 그 날. 그 날은 싸이에게도, 내게도 특별한 하루가 되었다. 퇴근 후 강남역 어느 파스타집에서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동그랗고 큼직한 눈, 두툼한 코, 웃음이 많은 얼굴, 작지만 균형 잡힌 몸. 나보다 세 살 어렸던 그 아이와 이야기가 잘 통했다. 오랜 친구처럼 분위기가 좋아 내친 김에 2차로 맥주 한 잔을 더했다.


어둑한 곳에서 붉은 조명을 받은 그 아이의 모습은 조심스러운 면접 지원자 같았지만, 웃을 때마다 햇살이 비치는 듯했고, 그 모습이 내게는 선물 같았다.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서로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충 그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화내는 법을 잘 몰라요. 어릴 때부터 화내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그냥 웃고 넘기거나,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너무 착하게 보기도 해요. 근데 사실 가끔은 그렇게 착한 척만 하는 게 답답하기도 해요.”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언제나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이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를 파하고 무슨 자신감이 들었는지 강남역 cgv 횡단보도 끝자락에서 초록불이 깜박일 때, 그 아이의 깊고 매끄러운 머릿결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가 갑자기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코 순탄치 않았던 3년이 지났다. 그날 말했던 ‘화내는 법’은 나를 만나면서부터 알게된 것인지, 가끔씩 폭풍처럼 드러내는 화끈한 모습으로 내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잠시 헤어진 기간도 있었지만 그 단점을 보듬어 주고 싶었고, 그 아이도 나의 수많은 크고 작은 못난 점들을 없었던 일처럼 해주었다. 결국 우리는 결혼을 했고, 오랜 신혼의 달콤함을 즐긴 뒤, 이제는 두 살이 넘은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지금은 솔직하고 진실된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좋다.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갖지못한 장점이며, 내가 그 아이에게 빠진 진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내가 된 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좋은 남자친구는 직접 만나보면 알 수 있고, 좋은 남편은 결혼 전에 짐작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사람이 좋은 아빠가 될지는, 하늘의 뜻이야. 아이를 낳아봐야 비로소 알 수 있거든. 좋은 아빠라서,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야.”

그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 장거리 출퇴근으로 지친 나를 위로하려는 작은 배려였을까, 아니면 내 자존감을 건드려주는 특별한 칭찬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말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는 것. 승진을 앞두고, 동시에 둘째출산을 앞두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을 다독여 준, 그 한마디가 내 자존감을 크게 올려준 사건이었다.


결혼 후, 아내에게 들었던, 최근 내가 아는 사람들을 통틀어 들었던 최고의 칭찬이기에, 이 곳에 이렇게 기록해 둔다.


작가의 이전글 기린 같은 아빠 vs 말 같은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