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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Dec 05. 2022

엄마는 나를 어떻게 키우고 싶었을까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9살 때 엄마는 나를 수영장에 등록해줬다. 우리집은 버스 종점에 가까웠고, 수영장 역시 버스 종점에 가까웠는데 그 종점이 서로 반대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최소 한 시간 거리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곱씹을수록 그 먼 거리의 수영장을 왜 다니게 했느냐는 차치하고 어떻게 그 먼 거리를 픽업이나 드랍없이 ‘혼자’ 다니게 했느냐가 더 미스터리였다. 남편은 9살짜리 여자애가 일주일에 세 번씩 한 시간 거리의 수영장에 버스를 타고 혼자 다녔단 얘길 듣고 기함을 했다. 난 그게 아주 평범한 일인 줄 알고 있다가 중학교 때 친구들과 ‘처음 혼자 버스에 탄 나이’를 공유할 때 내가 비정상적(?)으로 이른 나이에 혼자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 둘을 데리고 엄마 몰래 시외버스터미널에 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에 있는 놀이공원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냥 뭐랄까, 난 참 겁대가리 없는 초딩이었다.


  최근에 엄마와 이런저런 얘길 하던 중, 문득 생각이 나서 물어봤다. 그때 왜 9살이던 날 한 시간 거리 수영장에 혼자 보냈냐고. 엄마의 대답은 참 더도 말고 더도 말고 딱 엄마 같았다.


  그냥, 수영장이 거기밖에 없었어!


  그러면서 한단 얘기가, 내가 중학교 때 같이 집으로 가던 길에 번화가에서 버스를 타는데 번호를 착각해서 잘못 탄 적이 있었단다. 그걸 버스 타고 나서야 알았는데 깜짝 놀라 헐레벌떡 다시 내리고 보니 나도 잘못 탄 버스에서 내려있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그 얘길 듣고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9살이던 딸은 그 먼 수영장에 혼자 버스 태워 보내 놓고 핸드폰도 있었던 중학생 딸이 버스를 잘못 타서 길을 잃을까 봐 걱정을 하다니. 참나. 엄마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날 키운 걸까? 불현듯 궁금해졌다.


  뭐 결과부터 말하면 나는 아주 독립적인 아이로 컸다. 늘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엄마 대신 알아서 저녁을 차려 먹었고, 하루 쉬는 주말에 엄마가 늦잠을 자면 혼자 책을 읽으며 엄마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도 혼자 다녔고, 엄마가 학교에 오는 일이라곤 졸업식 외엔 없었다. 학원도 거의 안 다녔고 엄마가 알림장이나 숙제를 봐준 적도 없으며 공부하란 잔소리를 들을 것도 없이 필요하면 알아서 공부했다. 친구들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엄마를 둔 날 부러워했고 나도 그게 편했다. 좀 더 많이 크고 나서야 그 독립성이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서 선택권 없이 형성된 것이라는 걸 생각하고 약간 슬프긴 했지만.


  엄마는 내가 독립적인 아이로 자라길 원했을까? 답은 모르겠다. 아주 엉뚱한 대답이 나오거나,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게 엄마에게 슬픔이 될까 봐 묻진 않았다. 아마 엄마도 나를 가지고, 뱃속에 품고, 걷지도 말하지고 못하는 아주 어린 나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어떤 꿈이 있었을 것이다. 공주처럼 키워야지, 똑똑하게 키워야지, 올바르게 키워야지, 으레 갓 엄마가 된 이들이 하는 생각들 같은 것. 심지어 아직 아이를 갖지도 않은 나도 남편과 그런 얘길 나누는데 엄마라고 그런 꿈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잘 자랐는지 모르겠다. 어떤 딸로 날 키우고 싶었는지 결국 엄마에게 묻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가끔씩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둘 쯤은 생기는 그런 딸이 되고 싶다. 꿈처럼은 못 자랐더라도, 그냥 태초에 이렇게 키우고 싶었던 것 같다고 생각할 만한, 내가 원하던 대로 큰 것보다도 더 잘 컸다고 생각할 만한 딸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 상상했던 딸의 모습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사는 것, 그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날 키웠을 엄마에 대한 보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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