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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Apr 13. 2023

채식주의자와의 절교

  이 글이 그 애에게 가닿을까?


  뽀얬다. 그건 단순히 흰 살결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애에게서 풍기는 아우라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시고, 어머니는 다정다감하시며, 사랑스러운 강아지 한 마리와 곱다란 머릿결, 시원하게 길쭉히 뻗은 팔다리가 '곱게 자란' 티를 아낌없이 뽐내주었다. 남쪽 바다 도시의 공장지대에서 들판의 잡초처럼 아무렇게나 자라난 나와는 판이한 아이였다. 그래서였을까? 살다보면 도저히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모르게 시나브로 가까워지는 사람도 만나고, 아무리 가까워지려 노력해도 한 발짝 너머 평행선처럼 절대 가까워지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되는데, 그 애로 말할 것 같으면 완벽히 전자였다. 어떤 접점도 없는 것 같은 별처럼 먼 우리는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된 것을 계기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랬던 그 애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게 된 건 그로부터 1년 쯤 뒤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에 도전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평행선보다 더 멀고도 험한 어떤 이가 그 애에게 커다란 생채기를 냈고, 나는 그것을 내 상처처럼 아파했다. 일이란 것도 혹독하고, 인간관계도 혹독한 것이라 일로 엮인 인간관계는 때로 최악의 혹독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든 것을 접고도 비루하지 않을 수 있는 뽀얀 그 애에게 나는 당분간의 휴식을 권했다. 어떤 생각은 접고, 어떤 생각은 펼칠 수 있다는 길을 걸어보는 게 어떠느냐고.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어떠한 지점에서든지 변화가 있다고 했다. 그런 변화가 있길 바랬다. 되도록이면 행복하고 되도록이면 아름다운 변화. 이 비좁은 땅을 떠나 극적이게 평범하거나 무난하게 멋진 생각 같은 것을 질리도록 하고 오길 소망했다.  


  몇 달 간의 긴 걸음을 매듭짓고 한국에 돌아온 그 애를 오랜만에 만나는 날, 그 애가 선택한 메뉴는 '회'였다. 콘치즈, 꽁치구이, 다시마와 초장, 생당근 같은 것들을 상에 늘어놓고 마주 앉아 스페인의 이국적인 풍경을 생생하게 전해들었다. 하루에 몇 키로를 걸었으며, 발이 얼마나 아팠으며,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먹었는지가 세계테마기행 내레이션처럼 은은하게 횟집을 울렸다. 그리고 그 끝에 듣게 된 말은 뜻밖에도,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나는 채소를 싫어한다. 건강을 위해 의무감에 먹지만, 부러 먹고 싶었던 적은 손에 꼽을만큼도 없다. 고기를 먹어야 든든하다고 생각하고, 해산물 조차도 누군가 권유하는 안주가 아닌 이상 등한시해왔다. 그리고 그런 식성은 이상한 것도 아닐만큼 주변에 흔했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은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작품에서나 읽었지 현실 속의 나에겐 생경한 단어였다.


  사실상 그렇다 해도 내 친구가 채식주의자가 라는 사실이 내게 어떠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같은 평범한 잡식성 인간과 채식주의자 사이에 가끔이면 족할 공통 분모가 없는 것도 아니다. 루꼴라를 얹은 피자에 감자튀김을 먹어도 되고, 김치전과 두부찌개에 막걸리를 마셔도 된다. 하지만 그날의 나에게 그런 교집합은 보이지 않았다. 음주가 가져오는 전형적인 편협한 사고의 오류였다.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어떤 말들로 나는 그 애의 채식을 말렸고, 결국 그 애는 격분하고 말았다. 아마 그 사이엔 설득하고 만류하며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어떤 지난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끝은, 고기를 먹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가끔 SNS로 전해 듣는 소식 속 그 애는 그 이후로도 고기를 먹는다. 평생 먹어온 고기를 하루 아침에 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평생갈 것 같던 관계는 너무나 쉽게 끊어진다. 이 사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은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비해 지나치게 숱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런 상황이 주는 상처에 대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다 부질없다'는 달관 뿐이다. 어째서 허무는 이토록 가까이에 음침하게 머무르는가.


  몇년 뒤, 그 애는 우리가 몹시 자주 가던 술집 바로 옆에 카페를 열었다. 그 사실을 알고 한동안은 어떤 상념에 허우적대며 지냈다. 관계는 끊어졌지만 관계에 대한 미련은 끊지 못한 탓이겠지. 어느 날 무 자르듯 툭 끊어진 인연. 하지만 우리가 '두번 다시' 볼 수 없었다고 끝맺음 하지 않는 것은, 그런 절단면에서 부지불식 간에 새로운 시간의 싹이 틀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시간 속에 누가 있을 지는 어떤 경우에도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속에 그 애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예전처럼 함께 빛나도록 달렸으면, 시시콜콜하게 웃었으면 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바람만으로 족하다는 걸 안다. 그저 서로의 시간 속에 최선을 다해 살다가 어느 때엔가 다시 닿게 된다면 그땐 그냥 미안했다고 말하겠지. 그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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