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부고를 받았다. 발신인과 미리보기만 보고, 안타까운 탄식을 뱉으며 그분의 아버지나 어머니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카톡엔 발신인의 이름 석자 뒤에 부친 혹은 모친, 어떠한 가족관계도 기입되어있지 않았다. 열 번쯤 그 부고를 다시 읽어보고도 믿기질 않아 주변에 연락을 돌렸다. 모두 한결같이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이었다. 다시 열어본 카톡 창의 부고 위쪽엔 바로 전날 보낸 업무 관련 메시지가 답장 없이 휑뎅그렁히 있었다. 우리 일이 늘 그랬듯, 끼니도 보살피지 못하고 일을 쳐내느라 바쁘셔서 그런 줄 알았다. '아부지'라고 부르던 옛 회사 팀장님이었다. 20대 후반이었던 나에게 아부지라 불리기엔 한참 젊은 나이셨지만 장난스럽게 '아 아부지~!!'라고 하면 참 사람 좋게 웃어주시던 분.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그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내일 아침에 당연히 태양이 떠오르듯이, 내일 아침 내 삶도 여전히 이 공기 속에 떠다니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알람을 맞춰놓고, 할 일을 계산해두고, 점심은 뭘 먹을지 고민해보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 당장 삶이 끝난다면?' 같은 생각은 가슴 깊은 곳 두터운 금고에 넣어두고 아주 가끔씩만 꺼냈다 다시 제자리에 넣어둔다. 어쩌면 당연하다. 인생에 망각만큼 훌륭한 기폭제는 없다. 매일이 고난과 인고의 연속인 삶에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른한 몸을 더 나태해지게 주무르기만 할 뿐이다.
부고로 심란한 마음을 안고 장례식장에 갈 채비를 하는데, 팀장님과 함께 일했었던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은 뒤 그가 꺼낸 용건은 조금 의외였다. 혹시 이전에 팀장님 사진을 찍어둔 게 있으면 보내달라고. 이제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들에게, 그분이 얼마나 멋진 아빠였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네가 사진을 잘 찍던 게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우선 찾아보겠다는 대답을 하고 얼떨떨하게 전화를 매듭지었다. 내가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었던가? 함께 일한 게 벌써 3,4년 전이기도 하고 그땐 나도 연차가 낮을 때라 팀장님보다는 막내작가나 조연출들과 더 어울려 다녔었기에 더욱이 팀장님의 사진이 과연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세상이 좋아져 이 전, 이 전전 핸드폰에 있던 사진도 모두 새 핸드폰에 옮겨올 수 있게 되면서 워낙 사진이 많아지다 보니 옛날 사진을 뒤적이는 일이 많이 없어졌다. 치기 어린 서로의 어린 시절을 알고 지내는 가까운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더욱 옛 사진은 볼 일이 없다. 그래서 나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분의 사진이 내 핸드폰 안에 그리 많은 줄은. 멋진 예술가와 셀카를 찍으시는, 시간에 쫓겨 출연자 아이를 들쳐 안고 현장으로 뛰어가시는, 불콰해진 얼굴로 '피디는 말이야'라며 훈계 레퍼토리를 시작하는, 장시간 촬영에 녹다운된 카메라 감독을 대신해 카메라를 든, 소품으로 쓸 통기타를 연주하며 80년대 노래를 부르시는 팀장님이 내 핸드폰 안에 고스란히 잠겨있었다.
모두 작정하고 찍은 것은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겐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에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찰나여도 무엇이라도 찍으려고 애를 썼고 수많은 그 결과물들을 의도치 않게 늘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들을 만나면 그것을 함께 꺼내보며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언제 이런 걸 찍었냐'는 핀잔은 잠시였다. 담아두지 않으면 남아있지 않을 기억이 더 많기에. 삶은 계속되고, 기억은 한정되고, 추억은 흐릿해진다. 내가 아니라면 내 사진첩이라도 기억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걸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들은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차를 몰고 가다가, 몸에 이상을 느끼고 잠시 정차를 한 사이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벌어졌다고 했다. 비통한 소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전 팀장님의 사진을 전해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조만간 다시 같이 일하자고 했는데. 거하게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야속하게도 팀장님은 단상 위에서 메마른 웃음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떠나보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아주 오랜만에 망각의 금고를 열고, 내일 당장 삶이 끝나는 일이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음을 상기했다. 만약 그리도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아마 난 묵혀둔 사진첩을 열어볼 것이다. 친구들과 웃고 있는 나, 치열하게 일하는 나, 그리고 내 삶의 길을 함께 걸어와 준 매 순간의 사람들. 앞으로 살아갈 삶들이 정의하는 내가 아닌, 이미 살아온 삶들이 정의한 나. 언제라도 끝날 수 있기에, 지나온 길이 될 앞으로의 나날들을 더 진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고, 다시 망각의 금고에 '죽음'이란 근심을 넣어둔다.
아부지,
하늘에선 카메라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오래도록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