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려올 곳에 굳이 오르는 이유
미쳤다고 등산을 하나?
그 시절엔 그런 생각이었다. 꾸역꾸역 힘들게 올라가서 잠깐 바람 쐬고 다시 내려올 걸 왜 굳이 시간과 힘을 들이나 싶었다. 아직 어렸기에 주변에 등산을 즐기는 사람은 없었고 하루라도 집에 붙어있으면 엉덩이에 뿔이 나는 성격상 정말 할 일이 없을 때 보람을 찾기 위해 가끔 간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다녀오면 적어도 1년은 다시 등산을 가고 싶지 않았다. 보람은 잠시 뿐, 올라갈 땐 숨이 차고 내려올 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랬던 내가 일주일에 세 번씩 등산을 다니게 만든 건 바로 '도봉산' 때문이다.
길 '도(道)'에 봉우리 '봉(峰)'. 그야말로 봉우리 자체가 길인 곳. 산 전체가 커다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간 500만 명이 찾는 유명한 산이라지만 오랜만의 산행에 그곳을 고른 이유는 단지 '7호선만 타고도 이동이 가능해서'였다. 백팩에 맨투맨과 뽀글이, 그냥 그대로 출근해도 이상하지 않은 복장으로 가볍게 도봉산에 도착했지만 도봉산은 그리 호락호락한 산이 아니었다. 이름만 들어도 추운 '냉골 계곡'을 어찌어찌 넘어온 팔과 온 다리를 있는 대로 찢어가며 이동해야 하는 Y계곡을 넘을 땐 '이대로 떨어져서 죽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정확히 다섯 걸음에 한번씩 찾아들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겨 신선대에 도착하고 서울을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는 순간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기된 느낌이 찾아왔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고 벅차오르는 기분, 그 기분이 지금의 나를 '일주일에 세 번 등산하는 사람'으로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그리고 등산 중인 나)은 대부분 여전히 '미쳤다고 등산을 하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등산을 다니는 나를 아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덤이다. 내 체력에 대한 과대평가도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나 역시 올라갈 땐 숨을 헉헉대고, 주로 '아 오지 말 걸'이란 생각을 하며, 내려올 때는 무릎이 욱신거린다. 그렇다면 나는 왜 등산을 하는가? 산이 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대가와는 조금 다른 문젠 듯하다.
하루하루가 재밌고 매일이 색달랐던 어린 시절이나 대학 시절과는 달리 직업을 갖고 경제 활동에 뛰어들게 되면 어제가 그제 같고 내일이 모레 같은 일상의 딜레마에 빠지기 십상이다. 당장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3개월 전 주말엔 무엇을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쉼을 찾으며 비슷비슷해지는 일상을 바꿔줄 큰 패가 바로 등산이다. 올봄 새싹이 돋아나기 전 도봉산에 갔고,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수리산에 올랐고, 단풍을 만끽하러 속리산에 다녀왔다. 산만 떠올려도 그날의 날씨, 함께 한 사람, 끝나고 먹은 것들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늘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 속 가장 확실한 한 땀의 박음질이 되는 게 등산인 것이다.
더불어 힘든 몸과 고통스러운 감정을 이겨내고 능선에 도달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멋진 풍경이 주는 근사한 기분, 스스로를 이기고 버텼다는 자랑스러운 느낌, 고된 운동을 마치고 먹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어진 음식 등은 말할 것도 없다. 평생 다이어트라는 숙제를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날 만큼은 아무리 먹어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 것도 한몫을 한다. 등산이 면죄부가 되는 셈이다.
올 가을은 12개의 산을 올랐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인 우리나라는 무려 4000여 개가 넘는 산이 있는 곳이다. 그들은 모두 높이도, 모양도, 산을 이루는 지형과 식물들도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산은 1000m가 넘어도 80%까지는 차로 갈 수 있어 쉽게 정상에 닿을 수 있고, 어떤 산은 300m만 되어도 가는 길이 험준하다. 흙과 돌, 나무뿌리를 텁, 텁, 밟아 올라가며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결국 우리의 인생과 꼭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누군가는 차로 정상 턱밑까지 올라갈 수 있고,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계곡을 넘어야 정상에 갈 수 있고, 누군가는 아무런 풍경도 없이 평지만을 걷고 걸어야 하며, 누군가는 뒤만 돌아도 눈이 시원해지는 수려한 경관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제각각 그러하게 다르듯이.
뉴질랜드 출신의 탐험가이자 산악인인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떠나기 전 왜 에베레스트에 가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Because it is there)"이라는 유명한 답을 남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우문현답처럼 느껴졌지만, 어쩌면 가장 정답에 가까운 답이 아닐까 싶다. 그저 주어졌기에 인생을 살아나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곳곳에 산이 놓여 있기에, 그저 가쁘게 올랐다가 후련히 내려오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