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일까, 나일까?
열여덟 소녀들의 취향이란 것은 참 다양해서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한 반에 모여있더라도 좋아하는 것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야구를, 누구는 애니메이션을, 누구는 신변잡기를 좋아했고 그 속에서 나는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데에 누구보다 열혈이었다. 인터넷 강의를 듣겠다고 엄마를 졸라 큰맘 먹고 구매한 pmp로 야자 시간에 방송하는 가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보았고 그걸로 모자라 내가 좋아하는 그룹이 나오는 부분만을 편집해 닳고 닳도록 돌려보았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멤버가 오늘 입은 옷과 오늘 했던 애드리브를 열심히 설명했으며 수험을 앞두고 귀하디 귀한 수면 시간에도 숱하게 그이의 꿈을 꾸곤 했다. 물론 그 열정은 대학에 가자마자 잦은 술자리와 함께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원래 영상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남들 다 본다는 유튜브도 멀리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알고리즘에 그때 그 시절 그 아이돌 그룹이 뜬 것을 보았다. 썸네일만 봐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뻔질나게 봤던 그 무대 의상! 클릭을 누르고 숨 고를 틈이라도 줄 요량인 듯 광고 타임이 지난 뒤 경건하게 흘러나오는 딴딴 딴딴 딴딴 딴딴- 어쩜 도입부 비트만 들었는데도 가슴이 솜사탕 녹듯 사악 간지러워지는지.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 앞에도 미모는 여전했고, 아니 오히려 더 빛나는 듯했고 촌스러운 느낌도 전혀 없었다. 홀린 듯 무대를 보다가 잊고 있던 멤버가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크으-‘하는 목욕탕에 몸 담근 아재표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적 댄스는 이미 반외적 댄스로 바뀌어 나도 모르게 그 시절 안무를 따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3분이 훌쩍 갔고, 연관 동영상을 누르고 누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상을 다 보고 말았다. (아, 이래서 유튜브가 대기업이 되었구나.) 하. 가슴이 따뜻해진 이유는 뭘까. 피어오른 미소에 촉촉하기 그지없던 잇몸도 말라붙어 퍼석해진 지 오래다.
입시라는 목표 외엔 쏟아부을 곳 없던 열정은 이제 일, 삶, 가족, 친구, 여가, 재테크에 나누기도 벅차 졌고 현실 속의 나를 제련해 더 나은 미래로 끌고 가는 일만으로도 마음은 가쁘다. 토끼를 한 마리만 잡기에도 힘에 부치는데 서너 마리나 챙기기엔 몸은 하나 손은 두 개뿐이다. 부모님께 전화드리는 것도 깜빡 잊고, 1년 만에 만난 친구를 1년 안에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숨 가쁘게 인생이란 쳇바퀴를 돌려내다 10대 때의 온 열정을 쏟아부었던 그들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멈춘 쳇바퀴를 타임머신 삼아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지금은 30대가 되어버린 나라는 사람 안에도 뜨거운 불이 지펴졌던 10대의 내 모습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아마 다신 누구를 그렇게 맹목적으로 열렬히 좋아할 수 없으리란 슬픈 직감도 함께.
한 때는 멋진 옷을 입고 예쁜 헤어 메이크업을 한 아이돌 가수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인생의 가장 젊고 예쁜 날에 가장 멋진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원 없이 담아둘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그들의 박제된 모습 속에는 가장 열정적이었던 내 모습도 함께 박제되어 있었다. 어떤 대가도, 어떤 목적도 없이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그때의 나, 그때의 마음. 치열하고 분주한 삶에 내 중심을 잃어갈 때, 다시금 십수 년 전 그들의 모습을 다시 열어보고 싶다. 마치 그때처럼 다시 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