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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기자생활 May 28. 2021

물이 주는 힘은 참 대단하더라

내 생애 5번째 제주도 여행기

"자, 밑줄 쳐놓고 외우세요"

우리 잠깐 중학교 시절 역사 시간으로 되돌아가 보자. 중학교 역사책을 탁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건 선사 시대 이야기. 그러면 역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들은 물가 옆에서 살았어. 시험에 나오니까 밑줄치고 꼭 외워라." 이 사실은 그 시절 나에겐 그냥 외워야 하는 정보에 불과했다. 시험에서 100점 받고 싶으니까. 그냥 그런 줄 알았고, 그래서 암기했다.


몸으로 조상들의 지혜를 체득하는 데에는 15년이나 걸렸다. 코로나가 터지고 참 제주도를 자주 갔다. 1년 동안 제주도만 4번. 25살이 되도록 1번밖에 가보지 못했던 공간을 코로나 시국에만 4번이라니. 우리의 일상을 망쳐놓은 코로나가 나에게 준 유일한 기쁨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바다 바라보는 친구


제주도를 선택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갇히는 듯한 느낌을 싫어하는 나는 2시간 이상 차 타고 이동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부산이나 여수+순천은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차로만 왕복 8시간을 이동할 바에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가는 게 나한테는 더 매력적이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비용도 더 합리적이었고.


그런데 이번 제주도 여행이 내 인생 어떤 여행보다 제일 기억에 남는다. 10년 동안 꿈꾸고, 1년 동안 준비해 750만 원을 투자한 뒤 5주 동안 다녀온 유럽축구여행처럼 말이다. 앞서 다녀온 여행들은 제주도,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여행 가고 싶어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으로써 제주도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제주도가 목적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일정도 가장 여유롭게 준비했다.하늘도 도와줬다. 비가 온다는 소식은 어느새 화창한 날씨로 바뀌어있었다. 30분이나 지연됐던 비행기 일정도 날 화나게 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나에겐 일상에서의 탈피였다.


제주도야, 안녕


오후 4시. 느지막이 도착한 제주도는 약간 흐릿했지만 그렇게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아 본 기억이 없다. 강제적으로 마스크를 쓴 뒤로 1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함이 내 코를 찔렀다. 참 기분 좋더라. 그렇게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도착한 바다. 정말 반갑더라. 마음 같아선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었지만 이제는 물에 들어가면 심장마비 걱정부터 들더라. 몸 걱정하는 것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제주도 흑돼지집. 인생 고기인 제주도 흑돼지를 친구와 막걸리를 나누며 먹었다. 맛있는 고기를 먹고 찾아온 적당한 배부름만큼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게 있을까. 그리고 숙소까지 바다를 따라 걷기로 했다. 거리는 1시간 20분 남짓. 일상 속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선택. 그런데 제주도는, 정확히 말하면 제주도의 바다가 날 걷게 만들었다.


7개월 동안 달려오면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바닷바람에 실려 날아갔고, 그 속에서 잃어가던 삶의 여유가 다시 채워지는 느낌. 그때 중학교 시절 사회 시간에 외웠던 내용이 머리를 스쳤다. 사람은 물가 옆에서 산다고, 그래야 편하게 살 수 있다고. 그냥 사람은 물을 먹어야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그런 줄 알았다. 맞다. 하지만 물이 가져다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첫날 렌터카를 빌리지 않은 선택은 2021년 내가 내린 최고의 결정이었다.

정말 잘 만든 올레길 리본


둘째 날은 한라산 정상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날이 좋았다. 쌀쌀할까 봐 걱정했던 난 반바지와 반팔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침 공기를 마시러 나간 바닷가. 딱 그때 생각했다.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고. 예전에는 그냥 막연한 생각이었다면 그땐 정말로 진심이었다. 은퇴하고 제주도에 집 짓고, 아내와 남은 생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고. 걸어서 바다를 갈 수 있는 거리에 적당한 크기의 마당이 있는 집. 언제나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올레길을 걷는 나그네도 반겨줄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살겠다는 꿈을 가슴속에 새겼다.


차를 타고 친구와 내가 도착한 공간은 참으로 고맙게 어디든 차분했다. 바람은 육지보다 강하게 불었지만 시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선물했다. 그렇게 바람 따라 도착한 곳은 하모해수욕장. 사람이 아무도 없어 마스크를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자 두 놈이 거기서 나, 잡아봐라를 할 수는 없기에. 또 걷기로 결정했다.


모슬포항까지 올레길 10코스를 따라 걸었다. 지나가던 똥개도, 올레길을 표시하는 파란색과 주황색 리본도 날 반겨주는 듯한 기분.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 여자친구와 함께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사람들이 왜 올레길을 찾아 걷는지를 이해하게 되더라. 그리고 찾아온 노을. 노을을 주황색 빛깔로 보내주던 바다도. 참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제주도 5월 노을

둘째 날에만 2만 보를 걸었다. 그런데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2만 번의 발걸음은 뚜벅이 여행의 맛과 매력을 알려줬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올레길을 따라 제주도를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래서 제주도 1달 살기를 해볼까 고민 중이다.


2박 3일이 정말 2.3초처럼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를 찾아온 현자타임. 원래 여행을 다녀오면 내 집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6월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그만큼 좋았다. 7개월 동안 치열하게 달려와서, 제주도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왜 그렇게 좋았을까 차분히 생각해보니 바다, 물이 주는 힘이 날 행복하게 해줬다. 이래서 사람은 물가 옆에서 사나 보다. 하나의 사실을 현실에서 깨닫기까지 15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40년 후의 미래를 꿈꾸게 만들었다. 그래서 가을의 제주를 찾아가기로 준비 중이다. 벌써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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