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학자P Apr 11. 2019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

박경리 작가의 시를 읽다

프랑스 중세도시에서. 여기서도 글을 썼던 기억.



 예술고 문창과를 다니던 시절, 필사에 대해 처음 배웠다. 이후 수십, 수백 권은 족히 될 시집과 소설들을 필사해왔다. 이후 필사는 학창 시절에도, 대학에 와서도, 직장을 다니고 그만두고 등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지속되는 습관이자 버릇이다. 나보다 앞선 누군가, 나와는 다른 생각과 시야를 가진 누군가의 글을 극단적으로 느린 속도로 음미하는 필사는 나에게 공부이자, 굉장한 안도감을 주는 행위였다.


 요즘도 필사를 지속하고 있다. 원서에도 도전할 만큼 필사의 분야는 다양해졌다. 인상 깊은 부분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쓰기라는 고지식한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저 책 여러 책을 노트를 나눠하다 보니 책 한 권이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필사를 하면, 언제나 작가가 되고 싶다.


 나는 작가가 된 나의 모습을 종종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그 영광의 작업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라고 짐작한다. 무수한 고뇌가 뒤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감히 그런 상상을 한다.


작가가 되고 싶다.


 오늘도 문득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짐 정리를 하다가 작년쯤인가 필사하던 박경리 작가의 시를 발견했다. 우리에게 토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시도 썼다. 글에 대한 그녀의 생각들을 살펴보는 일에는 그녀의 시가 좋은 답이 되어준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시 하나를 여기 남겨둔다.



 눈먼 말 - 박경리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작가가 되는 일은 눈먼 말처럼 고된 일일지도 모른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라는 구절이 가슴에 박힌다. 어쩌면 영광도 사명도 없을지 모를 그 길을 걸어갈 자신이 있을까.


 그러나 눈먼 말이 그러하듯, 그 길을 간다는 의미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일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길이 아닐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나는 여우가 신포도를 떠올리듯, 글과 작가에 대한 고통 어린 번뇌와 두려움을 떠올리며 잠시 꿈에서 멀어진다. 그러다가도 문득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대가들의 글을 필사하고 있노라면 슬금 마음이 앞선다.


 아,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


 무엇을 증명해내기 위해서인지, 어떤 이야기를 소통하고 싶어서인지, 그 모든 그럴싸한 이유를 덮어놓고.

그저 문득 작가가 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탁월함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