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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떡 May 01. 2024

건너편의 이름들

단편소설, 엽편소설 | 바디크림

그 꽃집은 작았지만 근방에서 가장 세련된 웨딩홀 바로 근처에 있어 벌이가 쏠쏠했다. 금요일 밤이나 주말 아침이 되면 꽃집의 사장은 핸드폰 화면에 SNS창을 띄워두고 누군가의 부케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제때 부케를 받지 못한 신부들은 다급하고 절박한 말투로 어떤 모양이어도 좋으니 부디 신선한 꽃으로, 최대한 빠르게 부케를 만들어 배달해달라고 애원했다. 사장이 결혼식에 무례가 되지 않을 옷으로 갈아입고 부케를 배달하러 가면 사장의 할머니가 꽃집을 지켰다. 노인은 아홉 평짜리 꽃집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녀가 향한 대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페인트가 갈라져 나뭇가지 모양으로 금이 간 낮은 건물들 위로 깨끗하고 빛나는 건물들이 난처럼 서 있었다. 손녀는 그 거리에 고급 가구 쇼룸과 대형 카페, 향수 가게가 줄을 지어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 거리를 걷는 손녀를 상상했다. 그렇게 15분 가량을 기다리면 말쑥한 차림의 손녀가 돌아와 앞치마를 메고 화분을 옮겼다.


신부가 웃더냐.


어느 토요일 오후, 노인은 웨딩홀에 다녀온 손녀에게 물었다. 손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 노인을 돌아보고는 안 웃지, 하고 대답했다. 할머니, 근데 거기서 결혼하는 애들 우리보다 훨씬 부자야.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에는 노인과 손녀가 30년을 넘게 살아온 조그만 주택이 자리해 있었다. 대문 바깥에 팔리지 않은 화분들이 쓰레기 봉투와 나란히 서 있었다. 노인은 잠시 집앞에 서서 옷을 갈아입을까 고민하다, 그대로 집을 지나쳤다. 대로를 건너자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웨딩홀 1층에는 그날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하나의 식이 끝나고 다음 식이 진행되려는 듯 직원들이 현판의 이름을 바꾸며 노인을 흘긋 쳐다보았다. 노인은 버려지는 종이와 새로 끼워지는 종이의 이름들을 찬찬히 살피다 건물을 나섰다.


노인은 그날 외운 이름들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어떤 행운으로 손녀에게 또다른 부케 주문이 들어오면 노인은 손녀를 기다리며 그 이름들을 찬찬히 외웠다. 노인의 등 언저리가 가렵기 시작한 것은 손녀가 갑작스레 주문이 들어온 부케를 두고 미간을 찌푸리던 어느 날부터였다. 꽃이 없어. 손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근 꽃집들은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이 주변에는 축하할 일이 없었다. 노인은 보라색 수국으로 크기만 불린 부케를 들고 신부의 이름을 하나씩 외다 팔을 뒤쪽으로 뻗어 등을 문질렀다. 조금 더 위쪽, 더 안쪽 어딘가가 꽃잎으로 살살 간질이듯 가려웠다. 손녀는 전화기를 들고 죄송해요, 일단 빨리 가져다드릴게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노인은 손녀에게 등을 긁어달라 부탁했다. 손녀가 긁어도 가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식장에서 돌아온 손녀는 바디크림을 하나 건넸다. 노인은 황급히 등을 까고 크림을 듬뿍 퍼 등 이곳저곳에 문질렀다.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은 손녀가 직접 발랐다. 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등이 상의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가려움증은 잠시 가라앉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시작되었다. 노인은 가려울 때마다 등을 긁기 위해 나뭇가지를 뚝뚝 분질렀고 흉이 날 때까지 긁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느 날 아침, 가게에 앉아 있던 노인은 가게 열 준비를 하는 손녀를 보며 생각했다. 손녀는 박스를 북 찢어 포장재와 리본들을 제자리에 옮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마른 헝겊으로 나무의 잎을 하나하나 닦고 있었다. 꽃병에는 새벽에 꽃시장에서 사온 싱싱한 꽃들이 몇 송이 꽂혀 있었다. 이 동네에는 축하할 일이 없으니, 저 꽃들은 잠깐 오는 불행을 막는 데 사용될 것이었다. 하지 마라. 노인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왜? 손녀는 누군가의 불행을 잠시나마 막음으로써 제 역할을 다하고 그 대가로 자신과 할머니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나쁜가?


노인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뭇가지로 등을 긁는 노인의 손이 바빠졌다. 바디크림을 잔뜩 바른 등 위를 딱딱하게 마른 나뭇가지가 미끄러지며 오갔다. 부케가 오지 않는 잠깐의 불편함에 비하자면 등의 가려움은 본질적이고 좀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손녀는 남의 불행을 잠깐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노인은 다시 한번 그날 외운 이름들을 천천히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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