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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a Dec 24. 2019

심야택시에 실린 연애사

광고회사 일기 #2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매일같은 야근이 이어졌다. 그래도 지치고 힘든 일정 속에서도 재미있는 일은 일어나는 법이다. 그게 나에게는 어떤 '만남'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야근을 하고 택시에 올랐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에 돌아오는 답이 왠지 모르게 반갑다. 


"어? 이 택시 한번 타지 않았어요?"


관련해서 한번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또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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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 얼굴을 봤지만, 기억나는 건 기사님의 뒷모습뿐. 긴가민가 하는 나에게 기사님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왜 그...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울던..."


그 말 한마디에 빠르게 기억이 돌아왔다. 그게 별써 몇년쯤 전인데, 생각지도 못한 추억이 소환된 탓에 나도 그만 빵터져 웃고말았다. 기억이 난다는 내 말에 아저씨는 신이 나서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의 위치부터, 다른 날 택시에 타서 헤어진 남친에 대해 묻던 일, 또 다른 날 택시에 타서는 다른 사람 안 만나냐고 묻던 일까지 그간 내가 이 택시를 꽤나 많이 탔다는 게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장거리 승객인 데다 두런두런 이야기도 잘 받아주는 손님이라 기억에 남았다는 게 기사님의 이야기였다.


덕분에 나는 집에 가는 내내 지난 몇년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던 그 즈음에는 언제나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어쩌다 남자친구와 외박을 하는 날에도 나는 노트북을 가져가 그가 잠든 새벽시간에 남은 일을 마치곤 했다. 그게 내겐 당연한 일상이었다. 우리가 싸움을 하던 그 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여자와 연락하던 걸 들킨 그는 우는 나를 내버려둔 채 밖으로 나갔고, 나는 한참이나 더 뒤에야 울음을 삼키고 PPT를 켤 수 있었다. 울면서 쓴 그 제안문서는 단 한글자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일해야하나 하는 생각에 더 서러웠던 기억만 있다. 


다른 날, 기사님이 헤어진 남친에 대해 물었을 즈음의 나는 일에 조금 더 익숙해져 있었다. 꼭 밤을 새워 일하지 않더라도 다음날 일찍 일어나 처리하거나, 상황을 봐서 요령껏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일의 총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으나, 노트북을 들고 집에 가는 빈도는 많이 줄어든 것이다. 이 때에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간간히 떠오를 때면 기분이 조금 울적해지는 정도랄까, 기사님께 말씀을 드리니 그런 똥차 잊고 좋은 사람 만나시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 그 사람의 자리가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날에는 기사님이 다른 사람 만나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이 즈음에는 완전히 털어버리고 내 인생에 전념하기 시작한 때였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되찾게 되었다. 일에도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져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 않는 상태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텅 빈 도로를 달리며 이어진 대화는 나의 연애를 돌아보게도 하고,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게도 했다.


대화 끝에 택시 기사님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하시냐고.

어떤 대답이 좋을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 시간에 야근하고 택시 타는 거 보면 완전히 행복한 건 아닌것 같은데


그치만 그래도, 지금은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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