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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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북동사발공장 뒷골목은 일제 때 안동과 예천을 동서로 이어주던 기차철길의 일부였다. 동란 때에 폭격으로 없어졌는지 아니면 물동량이 없어 철로를 폐쇄시켰는지 어쩐 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없어서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지금은 하천을 건너는 다리 외에는 옛 철길의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이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길로 되어버렸다.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작은 개울하나가 있고 이곳을 지나 오백여보를 내려가다 보면 안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보인다. 좁은 개울은 두 개의 콘크리트 보를, 넓은 하천은 세 개의 콘크리트 보를 이어주는 상판 위의 낡은 침목만 당시의 명목을 일깨워 주고 있을 뿐이다.
철길이 이어졌던 당북동에서 신 시장 입구까지의 길 양쪽에는 언제부터인가 무허가 판자 집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더니 이제는 골목길 좌우에 조그마한 집들이 병풍을 쳐놓은 듯 줄지어 늘어서기 시작했다. 남쪽에 이 도로를 낀 판자 집들은 구 철길 골목길로 삽짝 문을 내놓았지만 북쪽으로 도로를 낀 판자 집들은 하나같이 뒷벽을 담장 삼아 늘어섰고 그 사이에는 드문드문 신작로나 골목길이 철둑길과 십자로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이 골목은 시내의 중앙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골목길이 되어 버렸다. 특히 아침저녁으로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통행하는 길이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은 주로 넓은 신작로를 이용하지만 걸어서 다니는 학생들은 보통 이 골목길을 통행하고 있었다.
철도 관사 골은 제법 살기가 윤택한 사람들, 그래도 문화의 혜택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주로 선생님들이나 그 가족들, 철도 공무원 가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농업이나 상업이 주를 이루는 현실에서 월급을 받는 선생님이나 철도 공무원이라면 보릿고개를 겪는 이 시절에 3끼 밥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뜨거운 뙤약볕에 농사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며 깨끗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거주지였다.
많은 학생들이 이 길을 지나지만 관사 골에서 사는 아이들, 특히 여학생들도 다니는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이 길은 여고를 가로질러가는 길이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많이 다니고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시간이면 남녀학생이 온통 이 길만을 다니는지 학생들로 인해 골목이 비좁을 정도였다.
나는 바로 사발공장 뒷길과 신작로가 마주하는 골목 입구 두 번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좁은 마당을 끼고 남쪽을 향한 두 칸짜리 판자 집이고 그 문간방이 바로 내가 쓰는 공부방이었다. 그래도 안방과 내방을 통하는 중간에는 안방만 한 꽤 넓은 마루가 있고 집 벽과 삽짝사이 공간에는 함석을 덮어 제법 널찍하고 아담한 창고도 마련되어 있었다.
대다수 친구들은 따로 공부방이 없었지만 비록 작은 방이지만 나는 내 공부방 있었으니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나의 앉은뱅이책상은 광창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3단 책꽂이에는 책과 공책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책꽂이 상단과 광창 사이 공간에는 나무판에다 인두로 불에 지져서 쓴 「努力」이란 글과 시간표가 나란히 붙어 있어 제법 나의 공부에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내가 일어서면 가슴을 조금 넘어설 만큼의 높이에 광창이 골목을 향하여 밝은 반사의 빛을 맞이하고 있었고 광창 양쪽에는 목단 꽃을 그린 제법 괜찮은 커튼이 끈으로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집에 돌아오면 광창을 먼저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 이유는 이곳을 지나는 한 여학생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본 것은 작년 3월도 다간 끝자락이었다. 나뭇가지마다 앙증스러운 꽃망울들이 예쁜 소녀들의 교복 사이로 살며시 튀어나온 젖무덤 끝같이 그곳으로 손이라도 언듯 가고 싶은 그런 계절이었다. 그날 아침도 그 단발머리의 소녀가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까만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인 그녀의 옆모습이 광창 앞을 얼른 지나치는 것을 본 것은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순간이었다. 조그마한 거울에 나 자신의 얼굴 옆으로 지나치는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이 전부였다면 신은 자신을 위해 지금 이 순간 어떤 예감을 주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무엇으로 머리를 맞은 듯한 강한 충동을 느꼈다. 자석에 끌린 쇳조각 모양 나는 창문으로 끌려가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야야, 너 지금 뭘 보고 있나! 밥 먹고 퍼뜩 학교가지 않고!”
“아!”
어머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내 입에서는 가는 탄식의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무엇을 훔치다 들킨 도둑고양이처럼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가슴은 계속해서 두근거리고 있었다.
번개처럼 지나가 버린 아름다움의 영상이 첫날인 그날은 그래도 학교생활을 하면서 잊을 수 있었지만 침묵의 밤은 내 생각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시 아침에 스치고 지나간 그녀의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데 그 밤은 그녀에 대해 아름답다는 사고 이외에는 그녀에 대한 형상은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잡히지 않는 그녀의 막연한 영상을 더듬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잡힐 듯 잡힐 듯한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으며 그녀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뒷머리에 뜨거운 열이 뿜어 나오는지 베개가 열을 함께했고 머리의 무게에 낮아진 베갯머리를 수차례 돌려가며 세워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녀의 얼굴이 잡히지 않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광창 앞으로 다가가서 커튼을 들쳤다. 그러나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신작로 점방 옆 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갓 쓴 백열등 불빛만이 을씨년스럽게 주변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소풍전날이나 운동회전날, 섣달 그믐날이 아니면 별로 아침을 기다려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늘만큼 아침을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 뒤척이던 내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야야, 학교 늦을라 퍼뜩 일라 밥 먹고 학교가 그라!”
하는 어머니의 소리에 벌떡 일어난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눈을 비비면서 광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학교의 당번인 듯한 학생들이 가끔 지나다닐 뿐 별로 학생들이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마당으로 가서 세수를 마치고 책가방을 미리 준비해서 책상 옆에 세워 놓았다.
아직 3월이라 햇볕은 낮은 우리 집 지붕에 가리어 사발공장 담벼락 아래 골목길까지 비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담벼락에 비친 아침 햇빛이 그날따라 유난히 화창하게 내리쪼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양손을 걸치고 발뒤꿈치를 들어 목을 삐죽이 내밀면서 관사 쪽 철길을 향해 그녀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앞선 학생들의 무리 때문에 가려지기는 했으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맑고 굵은 눈, 날카롭게 서지도 않고 크지도 적지도 않는 편안한 콧날, 얌전하게 닫혀 있으면서도 방금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한 입술, 한발 한발 수놓듯이 걸어가는 저 우아한 걸음걸이, 어쩌면 사람으로서 저리도 잘 조화가 이루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렇게 그릴 수 없었던 그녀의 얼굴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자신이 신통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모습이 나와 가까워지자 얼른 고개를 방 안으로 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킬 순간에 백합 같이 우아한 그녀의 모습이 바로 내 앞 광창을 지나가고 말았다. 나는 한참 동안 홍당무가 되어 버린 얼굴을 하고 멍하니 서서만 있었다.
그 후로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내 광창 앞을 지나가야만 모든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은 일요일이 즐겁다고 난리들이지만 나는 일요일이 가장 길고 괴로운 하루인 것은 보아야 할 시간에 그녀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하고 광창 사이로만 그녀의 모습만 훔쳐보면서 사모했던 괴롭고 지루했던 일요일을 보낸 7월 초였다. 아마 그날은 내 일생에서 몇 번 되지 않는 가장 행복했던 날 중 한 날이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 아침에 그녀를 본 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학교를 다녀왔다. 월요일이었지만 마지막 수업이 담임선생님의 수업이었는데 갑자기 집안일로 휴강을 하시게 되어 일찍 끝나고 집에 돌아온 행운의 날이었다. 날씨가 무척 더워 창문을 열어젖히고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마당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목물을 한 후 들어와서 방바닥에 누웠다. 어디선지 살랑거리는 미풍이 열린 문을 타고 들어와 물기 있는 가슴팍을 살며시 간지려 준다. 작은 마당에 싱그러운 잎에 둘러싸인 여왕과 같은 아름다운 장미꽃도 나를 향해 부러운 듯이 밝은 미소를 띠우고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설친 저녁잠 탓인지 아니면 오후시간의 여유로움인지 나는 스르르 낮잠이 들고 말았다.
“따닥, 따닥, 따다다 다닥!”
뜨겁게 달아 오른 함석지붕은 비만 내리면 무척 요란스럽다. 꼭 콩 볶는 소리가, 아니 들어 보지는 않았지만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신 인민군 따발총 소리같이 들려왔다. 그렇지만 어디 한 해 두 해 들은 소린가, 나는 이 요란한 소리가 귓전을 두드리는 순간에도 어렴풋이나마 빗소리를 들어가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소낙비를 몰고 짧은 처마를 넘어 문지방까지 비를 뿌린 순간에서야 나는 한낮의 단잠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문지방을 두드린 빗방울이 얼굴에 튀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 바람이 소낙비를 휘 몰아치자 이번에는 열린 광창의 창틀에 빗물이 튀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골목사이에 있는 함석처마 길이도 겨우 한자를 넘을까 말까 했으니 빗물이 튈 수밖에 없었다.
셔츠를 걸친 나는 광창 문을 닫으려고 얼른 일어났다. 그런데, 정말이지 믿지 못할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내가 창문을 닫으려고 광창 가까이 가서 창문에 손이 가다가 그만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광창 문 바로 옆에 머리카락 한 올만 봐도 금방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그녀가 우리 방벽에 기대서서 비를 피하고 있지 않는가! 정말이지 그녀와 나는 추녀 길이보다 더 짧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가까이 그녀와 함께 있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순간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한 그녀의 곁에 있는 나의 마음은 어쩌면 엄청나게 먼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아카시아 향내보다 더욱 짙은 향내가 내 시선을 타고 나의 정신을 온통 혼미하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는 향기 자체였다. 그렇다. 내가 꽃의 향내를 직접 코로 느끼는 것보다도 내 마음속으로 느낀 그녀의 향기는 코에 닿는 어떤 향기보다도 지울 수 없는 짙은 향기였다. 마음 구석구석에 밴 그녀의 향내는 온 정신을 짜릿하게 하는 그런 향내였기 때문에 온통 중심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이 정말 무서운 곳을 두려워해서 가까이 갈 수 없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에게 나 자신이 선 다는 것이 더욱 무섭다는 것, 두렵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도저히 창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창문을 닫는 순간 내 시야의 행복뿐만 아니라 그녀의 체취조차도 나의 인기척에 의해 깨어지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예측 때문이었다.
비는 더욱 세차게 함석지붕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고 나는 요란스러운 그 소리에 다시 정신을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그녀의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 있는 가련한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려 일어날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우리 집 앞을 다닐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깐 사이지만 끔찍한 생각이 들자 나는 튕기듯이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발이 미닫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이런 정도의 일은 나 자신의 안중에는 없었다. 얼른 벽에 걸어 둔 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마루 밑에 아무렇게나 챙겨 쳐 둔 비닐우산을 펴서 쓰고 그녀가 서 있을 뒷골목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예쁘게 잘 빗어 주었던 단정한 머리카락도 비에 젖어 있었고 희고 가녀린 그녀의 손길은 연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 내리고 있었다.
아, 빗물에 젖어버린 그녀의 흰 교복이 보얀 피부의 색깔로 변해 버려 속살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고 아름다운 그녀의 가슴을 받치고 있는 속옷 끈이 부드러운 곡선 같은 그녀의 양 어깨 중앙에서 확연히 나의 시선을 유혹하고 있었다.
“저기요.......”
나는 비에 젖은 가련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겸연쩍은 듯한 표정으로 우산을 내밀었다. 그리고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를 바라본 나는 너무나 두렵고 황홀한 나머지 도대체 말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다. 다소곳하게 우산을 받아 든 그녀는 그렇게 멀어져 갔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그녀의 속살을 바라볼 수 있었던 이날의 행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날 이후 나는 혼자만의 열병 속에 빠져들었다. 어디를 가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공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한 자리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생각할 기회가 있으면 나의 뇌 속에는 그녀의 모습이 파고 들어와 잠시도 가만히 앉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고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앙상한 나뭇가지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겨울 방학은 너무나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의 인기척은 쓸쓸하다 못해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고 짧은 낮과 그 긴 밤은 싸서 버릴 수도 없는 내 인생에 거쳐야 할 숙명의 세월이었다.
추운 겨울을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리 뒹굴어도 시원한 구석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가 직접 뜨개질을 해서 만들어 준 털모자를 귀밑까지 당겨서 덮어쓰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내릴 때는 포근하던 날씨가 햇빛이 나고부터는 바람을 동반하여 차가운 바람이 콧구멍을 통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함석창고 안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꺼냈다. 다행히 자전거 핸들에는 아버지가 달아 놓은 털로 된 토시가 있어 한결 따뜻했다. 아무튼 나는 조금은 미끄러운 눈길이었지만 뽀드득 거리는 눈길 30리 고향을 자전거로 갔다. 그녀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어버리려고.......
눈길 30리 길을 자전거로 갔으니 첫날은 피곤해서 금방 잠에 곯아떨어졌다. 둘째 날 한낮은 오랜만에 또래의 친척들과 어울려 노느라 그녀의 생각을 잊을 수가 있었다. 농촌의 짧은 한낮은 한가한 밤을 모두에게 이른 잠을 청하게 했다. 아무도 나를 위해 말동무가 되어 주는 이는 없고 간혹 코 고는 소리가 말똥거리는 나의 잠을 더욱 멀리 쫓고 있었다. 어둠과 적막만이 감도는 시골의 밤은 머릿속 전체를 단발머리에 까만 눈동자를 한 초롱초롱 한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듯도 했고 외면하는 듯도 했다. 그러나 분명 그녀는 나를 향해 무엇을 원하는 듯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밤의 뒤끝에도 그녀와 내가 함께할 무엇인가는 있을 듯 한 상상 속에 결코 아쉬운 순간은 잠을 저 멀리 쫓아내고 있었다.
또 한 번 몸을 뒤척였다. 바람소리에 창호지가 바르르 떨고 있었고 어깨 틈 사이로 위풍이 파고들었다.
“아가야, 일어나 밥 묵그라.”
새벽잠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벌써 아침 나들이를 다녀오신 할머니의 시원한 손길을 느끼고 눈을 떴다. 온통 사랑방에는 아침 햇빛이 가득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침상을 차려서 들고 들어오시는 큰어머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열린 문을 타고 함께 들어오는 한 아름 찬 공기도 따스한 분위기를 어쩌지 못했다.
“우리 새끼, 일어나 밥 묵어야지.”
눈을 뜨고 있는 순간부터는 또다시 그녀의 생각으로부터 일과가 시작된다. 정말 그녀에 대한 혼자만의 열정은 끝일 줄 모르고 더욱 타 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여기에서 주저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발이라도 그녀 가까이서 있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혹 지금 그녀가 내 집 광창 앞을 지나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시골에 온 자신이 무척 후회스럽게 생각이 들었다.
“안돼, 빨리 가야 돼!”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는 학년에서 최 상위권에 들어 담임선생님의 총애도 받았으나 그녀를 알고부터는 점차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서는 도대체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남들이 알까 두려워한 그녀에 대한 혼자만의 짝사랑인데 가까운 친구인들 알 리가 있었겠는가.
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 겨울방학이 채 끝나기 전인 어느 날이었다. 아직 녹지 않는 눈이 찬바람을 맞으며 음지 곳곳에 솜뭉치처럼 듬성듬성 남아있어 자나 가는 길손의 옷깃을 여미고 있었다. 나는 스펀지가 들어 있는 따뜻한 잠바를 걸쳐 입고 가죽장갑을 꼈다. 그리고 잠바 깃을 턱 위까지 올리고 그녀가 산다는 관사 골로 향했다. 사실 그녀가 사는 집은 지난여름에 그녀를 미행하여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찾아간다는 결심은 그 후 오늘 처음 해본 것이었다.
북쪽 재비원에서 흘러 내려오는 안개천에는 폐쇄된 철로의 잔재가 남아있어 침목 위에다 나무를 깔고 사람들이 건너 다니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둑길 한쪽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안개 천 둑을 끼고 판자로 지어진 두 칸짜리 가게가 있었다. 이 작은 사거리 집은 교차로의 역할을 하는 지대이기 때문에 아침이면 많은 학생들이 이 앞을 지나친다. 건너편 다리 입구에서도 한 40대의 시골 부부가 장사를 했었지만 학교로 가는 학생들로서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들리는 것보다 건너서 들리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적었는지 아니면 이쪽 아주머니가 혼자 사는 예쁜 아주머니였기 때문이었는지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슷한 시기에 양쪽이 가게를 했으나 건너편에는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고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어쨌든 이 가게는 다리 입구 쪽 한 칸은 조그만 점방을 하고 왼쪽에는 둑길 쪽으로 부엌을 달아내 방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점방 주인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과부인 듯했는데 키도 크고 제법 예쁜 30대 중반 정도의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혼자 사는지, 친척들도 없는지 더러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집 가게에는 주로 빵이나 음료수, 그리고 약간의 주류가 진열되어 있었지만 가장 짭짤한 수입은 학생들에게 가치담배를 팔아 챙기는 수입이었다. 왜냐하면 원가에 비해 이윤이 배 이상이기 때문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집에서나 밖에서나 담배를 피울 수 없으니 결국 등굣길에나 하굣길에 이 점방에서 가치담배를 사서 가게부엌에 들어가 피우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은 방학도 방학이지만 더구나 추운 날씨 관계로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점퍼 포켓에 손을 넣고 다시 한번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여 바람을 피하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막 점방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점방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주변을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담배를?.......”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한 바퀴 경계하듯 돌아보며 담배를 생각해 봤다. 내 주변에는 초등학교 시절에 벌써 담배를 배운 시골 출신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산에 나뭇짐을 하다 짬이 생길 때 어른들의 흉내를 내다가 담배를 배운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이 담배를 피울 때 가끔 한 개비를 내밀며 내게 권하기도 했다.
“야, 담배 한번 피워봐,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나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무슨 맛에 한 모금이라도 더 피우려고 저리도 빼앗아가며 피우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오늘 같은 날에 담배를 피워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학교 길에서 점방을 지나치면서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을 가끔 본 터라 단골 학생같이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줌마!”
이외라는 듯이 추위 때문에 반쯤 이불을 걸친 빨간 속옷 내의 차림인 아주머니가 문고리를 잡고 비시시 문을 열었다. 따스한 이불속 기운과 함께 여인의 향내가 잠시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머니요, 아리랑 담배 한 가치만 주소!”
아주머니는 여러 종류의 담배 갑을 반쯤 잘라서 꽂아 놓은 조그만 박스에서 담배 한 가치를 빼서 얼른 주고는 문을 닫았다. 딸과 함께 사는 이주머니인데 딸은 보이지 않았고 학생인 듯한 머리 짧은 젊은이가 이불을 한쪽으로 당기면서 누운 것이 언듯 보였다. 별 관심 없이 나는 노란 휠터가 달린 아리랑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솥 옆 부뚜막에 놓인 팔각정 성냥을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유황냄새가 콧 전을 스치면서 담배에 불이 댕겨진다.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같이 담배연기와 함께 호흡을 조심스럽게 들여 마셨다. 목구멍 속으로 담배 연기가 빨려 들어가자 잠시 정신이 몽롱하며 기분이 무척 좋았다. 처음 담배를 배우던 다른 친구들이 한 모금을 빨아 다니다가 콜록거리며 목이 따갑다고 했지만 나는 전연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담배를 더욱 깊게 한 모금 빨아 다녔다. 친구들이 숨어서 돌아가며 담배를 빨아 다니는 그 맛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한 친구가 한 모금이라도 더 깊게 빨아 당기고 아쉬운 듯이 다른 친구에게 넘겨주면 그 친구 역시 같은 방법으로 연기 한 방울도 밖으로 내 보내지 않고 폐부 깊숙이 넣었다 조심스럽게 뱉어내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나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모두들 끊기 힘이 든다는 담배를, 내 일생에 최초로 그것도 아주 쉽게 배운 첫날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담배가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아니 잠시 공백이 생길 때면 영락없이 담배를 찾게 될 줄은 몰랐다. 그 후 돈만 생기면, 아니 돈을 만들어 서라도 산책을 빙자해서 부모님 몰래 이 점방으로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다시 담배 두 개비를 사려고 아주머니를 부르자 사람이 겨우 빠져나올 만하게 문이 열렸다. 아주머니의 문고리를 든 겨드랑이 사이로 옷을 입은 청년의 옆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청년이라고 생각하며 담배를 종이에 말아 조심스럽게 잠바 안 포켓에 넣고는 종종걸음으로 점방을 나왔다.
보통 초가집이나 판잣집이 다수인 다른 동네는 길, 도랑 여기저기에 종이, 쓰레기, 사람이나 동물의 배설물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지만 관사 골은 잘 정리가 된 골목길과 기역자로 지은 양옥집들이 늘어서서 무척 깨끗한 동내다. 말 그대로 문화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기와를 이은 뾰족한 지붕, 대문에서 마루 앞 처마까지 등나무 넝쿨을 얹은 선반, 잘 다듬어진 여러 짝의 미닫이 마루문, 쇠창살로 된 창틀과 창문, 수십 해 동안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간 넝쿨나무의 줄기가 시멘트벽을 덮고 실핏줄 같이 빼곡히 추녀까지 기어 올라가 있었다. 담장 너머 앙상한 목련과 라일락나무가 가지마다 눈을 덮어쓰고 고개를 내밀면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 기가 죽기 전에 그녀가 살고 있는 동내만 와도 그만 기가 죽어 버렸다.
그녀가 집에 있을지, 언제 나올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녀의 대문이 잘 보이는 건너편 골목에서 무작정 서성거렸다. 날씨가 추운 관계로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어 다행이었다. 이웃 사람들의 나들이가 잦았다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가 담장까지 와도 그녀가 나오지 않는다면 집으로 가야지, 그림자가 담장 오른쪽으로 생겨도 나오지 않으면 집으로 가야지!”
하고 이래저래 나 자신에게 조건을 만들면서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겨울해가 서산 넘어 한 뼘을 남겨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발도 시리고 온몸이 춥기 시작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는 나 자신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낀 나는 집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잘 짜인 그녀의 목재 대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로 그녀였다. 한 발짝씩 나를 향하여 떼어놓는 그녀의 모습은 학의 모습 그대로였다. 큰 날개를 접으면서 성큼 멈추었다가 걸어가는 학의 우아한 모습, 늘씬한 다리를 가졌기에 학의 걸음걸이는 더욱 우아한 것이다. 단정히 입은 검은 코트가 그녀의 발걸음에 따라 앞깃을 가르면서 희고 아름다운 학의 다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다문 입술은 어째보면 도도하고 건방지면서도 남을 무시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긴 속눈썹에 쌓인 깊고 검은, 그리고 맑고 큰 눈은 바라보는 모든 이를 영락없이 깊은 그 샘 속으로 끌어들이고 말 것이다. 아니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맑고 그윽한 그녀의 눈동자로 끌어들이는 마법의 힘을 지닌 여인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적에 친척 누님의 결혼 잔치에 부모님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마당에는 초례청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웃 손님들과 젊은 처녀, 아주머니들이 신부가 있는 방을 둘러서서 신부의 모습을 보느라 야단들이었다. 나는 이웃 사람들이 평소에 보던 누님을 왜 저리도 보려고 난리들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웅성이다가 누님의 예쁜 결혼 한복에 족두리를 쓴 모습이 초례청에 나타났다. 사랑채에 오신 이웃 손님들이 누님의 모습을 보고 한결같이 혀를 차면서
“저런, 아이고, 꼭 떠오르는 보름달 같네! 이쁘기도.......”
하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다. 나는 그때 누님을 보고 왜 떠오르는 보름달 같다고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옛날에 들었던 이 말이 뜻을 이제야 실감했다. 십수 년 만에 바로 저 여인으로부터.......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주변을 보름달 같이 훤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을 눈치 못 채게 그녀를 행해 걸음을 재촉했다. 순간 그녀가 돌아서서 나를 발견했을 때 그녀로부터 소담하게 자라난 풀숲 호수 가에 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이 순간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온몸은 금방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녀는 살며시 목례를 하고 나를 뒤로 한 채 나에게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단발머리의 까만 코드의 그녀는 나의 타는 가슴을 모르는 채 발자국 소리만 남기고 차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서산마루에 걸린 해님도 아쉬운 듯 나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에게는 일요일이 무척이나 지루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책을 펴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글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허전한 광창만 물끄러미 쳐다보기가 일쑤였다. 저녁나절이 되자 공책도 빌릴 겸 오랜만에 친구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경직된 팔과 몸을 풀면서 뛰다가 걷다가 반복하면서 안개 천으로 향했다. 친구 집은 안개 천 하류의 둑방을 끼고 있는 새마을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다. 5월의 해님은 제법 길어 저녁 7시가 되어도 아직 어둡지 않았다. 밖을 향하니 우선 답답한 마음이 좀 트이는 듯했다. 안개 천 둑방은 파란 풀잎으로 가득 채워져 물줄기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낙동강을 끼고 바라보이는 갈래당의 숲이 차츰 어둠 속에 묻혀 가고 있었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멀리서 데이트를 하는 연인 한 쌍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의 어깨는 남자의 팔에 감긴 채 다정하게 대화를 속삭이는 듯하면서. 가끔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제 그들의 형태가 내 시야에서 윤곽을 나타냈을 때 나는 그만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야!”
그렇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바로 저 여인 옆에는 분명 내가 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녀가 바로 이 순간까지도 혼자 몸부림치며 사모했던 바로 그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동행한 사내가 이웃 고등학교의 최고의 주먹 잡이였던 것이었다.
“그래, 바로 그 사내였어, 내가 처음 그녀를 찾아가던 날, 그때 점방 집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던 그 사내가 바로 저놈이었어,”
이제 생각하니 그날 그 과부 아주머니와 밤도 아닌 대낮에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는 것이 서로 부정한 관계였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더러운 놈이.......”
내 눈에는 불똥이 튀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주체할 수 없는 나의 이성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무모하게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주먹은 내가 먼저 그를 향해 날렸지만 뒤로 나자빠진 것 또한 나였다. 내 코에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한쪽 볼이 심하게 당겨오고 있었다. 그는 발길로 나를 한번 툭 차고는 그녀를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몇 번이고 측은하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며 따라가는 그녀를 쳐다볼 용기도 나에게는 없었다. 발산하지도 못할 이글거리는 내 자존심만 어두운 허공 속에서 외롭게 맴돌 뿐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어둠이 깔린 길바닥에 제법 긴 담배꽁초가 눈앞에 보여 얼른 집어 들었다. 휠터는 이로 씹었는지 심하게 눌려 이빨자국이 있었고 담뱃불이 붙었던 자리는 발로 비볐는지 터져 있었다. 휠터를 옷에 한번 문지르고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이 한 모금 빨아 다녔다. 쓰고 독한 담배 연기가 폐부를 헤집고 들어왔다.
“이젠 나는 어찌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일을 해결할 묘책이 없었다. 나에게는 너무 벅찬 상대를 물리쳐야 할 아무런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개천 재방 둑에 털썩 주저앉아 한없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밤이 늦도록.......
습관이 되지 않는 내가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은 웬만한 결심을 하지 않고는 작심삼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운동을 배우기 위하여 도장에 등록을 했다. 무슨 운동을 해야 하느냐에 무척 고민도 했지만 정신적인 자세를 중요시하는 무인들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나로서는 검도를 배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머릿속에는 그녀 옆에 선 그를 제치고 내가 서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이를 물고 열심히 운동을 했다. 운동을 시작하자 같은 반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갈수록 내 주변에는 나를 두려워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에게 시비를 건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와 싸움질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반 친구들은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었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도 나의 의견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내가 낸 의견이 그들에게 좀 거스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낸 의견이 대다수 결정되곤 했다. 다른 반 같은 학년의 운동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클럽도 만들었다. 이젠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고 두려움도 없어졌다. 점차 내 발언은 그 농도를 더 해가고 이젠 그들의 의사까지도 자연스럽게 내가 결정하게 되었다. 남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는 못된 친구를 나무라기도 했고 주먹으로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친구도 혼을 내주기도 했다.
평소에 영리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착하다는 소리도 들었던 내가 어느 사이에 한 여인으로 인하여 의도하지 않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춘기의 절정에 이른 고삼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갈수록 그녀 옆에 있었던 그 사내를 더욱 증오하며 점점 나쁜 길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남들은 진학과 취업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술과 싸움 짓으로 하루를 보냈다. 주로 방과 후면 우리 또래나 한두 살 많은 학생이 아닌 껄렁패 친구들, 우리 학교 또는 다른 학교의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들이 함께 모여 역전을 배회하거나 시장 골목을 배회하면서 서로 패가 다른 친구들을 상대로 싸움을 했다. 더러는 약한 친구들의 돈을 빼앗기도 하고 지방에 있는 학교 친구들 집을 찾아가서 그들의 친구에게 힘을 과시해 줌으로써 친구의 주변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그러자니 자연 패싸움을 일삼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밤이 늦도록 술과 우리 또래의 같은 여학생들과 어울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사실 같이 어울리는 여학생 중에서 더러는 예쁜 여학생도 있었지만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로서는 다른 여인이 결코 눈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 했지만 그녀만이 나의 우상이고 그녀만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믿을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녀 말고는 어느 여자도 눈에 차지 않았다.
고등학교 수업도 며칠 남지 않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졸업반인지라 학교는 취업시험을 준비하는 학생과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수업은 오전에 끝났다. 공부는 뒷전인 우리는 할 일 없이 무리를 지어 어슬렁거리다가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을 탁구장을 가기로 한 것은 친구인 창이의 집이 여고 정문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고를 가려면 신 시장 사거리를 지나야 하는데 바로 이 사거리 코너에 탁구장이 있었다. 내가 이웃학교 최고의 주먹 잡이였던 강남이를 만난 것은 바로 이날이었다. 일층에 자리 잡은 이 탁구장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제법 많은 학생들이 탁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이 탁구장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기 싫은 강남이를 발견했다. 물론 그의 옆 탁구대에는 그녀도 친구들과 함께 탁구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 나도 제법 학교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터라 그도 나를 알아보고 잠시 눈길을 보내왔다. 한방에 보낸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나를 아주 무시하는 그런 눈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나의 분노는 승자였던 그와 그녀가 함께 있다는 것, 그때 그녀 앞에서 구겨진 자존심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는 이런 내 마음을 알 길이 없었겠지만. 나는 탁구 배트 하나를 손에 잡고 일부러 그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는 막 한 손에 공을 띠우고 다른 한 손에 잡은 배트로 공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지나면서 어깨로 힘껏 부딪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한 일이라 옆으로 밀려 넘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선
“이 자식이.......”
하고 나를 향해 서둘러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호구사이로 상대의 눈길을 차갑게 주시하며 죽도를 잡고 방어와 공격의 태세를 연마했던 처음의 실전이었다.
“격자 순간에는 기검체를 일치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격자 해야 한다.”
쩌렁쩌렁한 사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머리가 손에 잡은 배트와 유효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오른손은 머리 위로 크게 원을 그렸고 오른발은 그의 정면을 향해 구르면서 왼발이 당겨지고 동시에 안으로 비틀듯이 한 손목 스냅의 짧고 강한 힘이 배트를 통해 그의 정수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머리!”
나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의 머리를 가격한 배트가 그가 나에게 날린 주먹보다 먼저 정수리를 가격한 것이었다. 그래서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을 깨트리면서 다음의 현실에 지켜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빡!, 쿵!”
소리와 함께 쓰러진 강남이의 모습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친구나 그의 친구들, 아니 그녀조차도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일에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이 현실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의 소문이나 그날의 경험 측에 의하면 내가 큰 대자로 쓰러져있는 정 반대의 현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순서인데도 말이다.
당연히 새로운 승자 앞에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 연습이나 실전에는 배짱과 선수(先手)가 그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오늘의 일만 봐도 확실하다. 싸움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배짱과 선수 다음의 문제이며 운동을 배워도 겁이 많으면 배운 운동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덩치가 산(山)만 한 친구가 조그맣고 비썩 마른 친구에게 절절매는 꼴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깡다구, 즉 배짱이 없으면 좋은 운동도 쓸모없는 무기가 아니겠는가.
승자의 쾌감은 승자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독점적인 가치다. 바로 이 가치가 그녀에게 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나는 놀란 그녀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탁구장 문을 나섰다.
그 후로는 내 눈앞에서 강남이를 마주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일로 인하여 학교로부터 졸업 유보와 함께 경찰의 추적으로부터 도피하게 된 것이었다.
아름다운 꽃에는 벌레가 많이 낀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를 소유하려고 온갖 수작을 다 부리니 온전하게 자신을 지키기에는 무척 힘들 것이다. 그녀 역시 남성들의 시선을 뿌리치고 고고히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가보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내 귀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모 잡지사 표지 모델에서도 보게 되었다. 제법 돈이 있는 지방의 유지 아들과의 염문설도 떠돌았다.
여하튼 고삼을 기준으로 그녀는 내 주변에서 점점 먼 거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묘한 질투를 느꼈지만 세월과 환경은 체념과 함께 다른 일로 잊혀가고 있었다.
2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조그마한 무역회사를 다닐 때였다. 동료들과 무교동 낙지 집에서 한잔 술을 걸치고 있을 때였다. 홀 안의 조명은 테이블 위에 갓을 씌운 붉은 전등에만 의지하고 있어서 술집 분위기를 한층 무겁게 하고 있었다. 많은 취객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터라 분주해서 우리의 이야기도 제법 소리로 높여야만 들릴 정도였다. 건너편 구석에서 젊은 연인들의 취기 어린 말다툼을 대수롭지 않게 들리는 것은 우리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끔 화장실을 다녀오느라고 그들 앞을 지나 쳤지만 부러 그들을 살필 이유가 없었으니 무심코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얼마 뒤 나는 술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우연히 구석진 그 테이블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어두운 조명이라지만 내가 왜 그녀의 모습을 모르겠는가. 얼마나 원망하고 그리워했던 여인인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구석진 테이블에는 아까 동석했던 사내는 없었고 그녀만이 괴로운 술잔을 연신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동료들을 얼른 보내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두 번째의 행운의 기회가 무교동 낙지 집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어렵사리 그녀와 무교동 낙지 집에서 한 잔 술을 함께하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짜릿하고 묵직한 기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술잔을 기울이며 혹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비위를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감당하기 어려운 이 순간에는 그저 술만 들이켤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백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는 예쁜 입술 사이로 담배 휠터를 끼워 넣는 순간 나는 얼른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서 그녀의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피어오른 빨간 담뱃불과 함께 곱게 비치고 있었다. 잊혀버렸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가슴속으로 담뱃불 같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괴로운지 내가 따라주는 술잔을 연신 받아 마셨다. 나 역시 그녀의 비어버린 술잔에 술을 채우는 일 말고는 감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술잔만을 기울이는 사이에 통금을 예고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뒤엔 모든 교통수단이 끊어진다는 예고의 소리였다. 그녀의 숙소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이젠 집으로 갈 수 없는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묘하고 형언할 수 없는 희열, 지금의 결과에 대한 신비로움, 두근거리는 가슴, 나는 오랜만에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를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앞으로 다가 올 그 신비로운 순간의 기대를 잠시라도 상상해 본다면 술을 먹었더라도 결코 이 순간에 술이 취할 수가 있겠는가. 그녀를 마주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애타게 기다렸던 내가 아니었는가. 그 소원이 바로 손만 뻗으면 신비로움에 닿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상상하고 있었다.
열두 시를 알리는 시계의 시침, 분침, 초침 모두가 지금 나의 이 순간과 그녀의 신비로움에 숨을 죽이고 함께하고 있었다. 일어 설 줄 모르는 그녀의 괴로움은 종업원의 친절한 안내로 인하여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자리에 일어났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그녀를 부축하려고 곁으로 갔다. 아, 온몸에서 흘러 스며드는 향긋한 그녀의 향기는 나로 하여금 감히 그녀를 부축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행동을 멈칫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그녀의 어깨는 스스로 내 가슴으로 쓸려 들어왔다. 한 손으로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얼른 페스포트를 꺼내 계산을 마치고 카펫이 깔린 계단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은 땅바닥을 향했고 손은 입을 향해 가슴속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제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척이나 괴로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또 한 번 그녀의 길고 소담한 목덜미가 전신주 불빛 아래서 솜털같이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함께 요동을 치는 모습을 보자 나는 그녀의 등을 아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광화문 사거리를 건너 서대문 방향의 코너에는 국도극장이 있고 그 뒤 골목에는 한옥여관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조그마한 한옥 여관으로 데려갔다. 방이 없다는 주인아주머니에게 통사정을 해서 겨우 비상용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미닫이 방문을 열고 그녀를 요 위에 눕혔다.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다시 방안에 들어온 나는 그녀의 눈가에 흐른 눈물과 입 언저리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사실 밤이 깊어가도록 나는 내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리고 조용히 잠자는 듯했지만 비록 방바닥은 따뜻했으나 요와 이불이 하나뿐인 지금은 겨울 위풍으로 점점 몸을 오그라들게 하였다. 나는 졸음과 위풍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양복저고리와 바지를 벗어 걸고 그녀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이불 맨 끝에 몸을 끌어넣었다. 그리나 한참을 지나 보니 이번에는 벌어진 이불 끝자락에서 파고드는 위풍으로 인하여 내 몸은 점차 그녀의 곁으로 이끌려가고 있었다. 아니다. 위풍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녀의 곁으로 끌려간 것이리라. 그녀와 나란한 이 순간, 따스한 체온이 이불 안으로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와 짧은 이 시간이 무척이나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그 사이 잠은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손을 가져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밤을 지새워할지 한동안 신은 나 자신의 용기를 시험하는 듯했다.
결국 나도 남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내 손길은 그녀를 껴안으면서 은밀한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고 온 몸속에 흐르는 젊은 피는 오직 뇌의 맨 꼭대기에 몰리는 것을 느꼈다. 아! 너무나도 황홀한 이 순간을 신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손길이 잠시 그녀의 속옷을 잡는 듯했으나 결코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 나는 그리도 그리워했던 그녀를 소유하려는 이 순간이 나로 하여금 모든 세상을 가졌다는 자부심보다 더 큰 무엇이 나를 한없이 우쭐거리게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물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내가 모든 것 위에 존재한다고도 생각했다.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벅차오르는 이 마음은 터져 버릴 듯한 가을 석류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토록 그녀의 몸속으로 내 모든 정열과 꿈, 이상이 함께 하는 동안 그녀는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아무런 저항 없이 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던 이 순간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격렬했던 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 순간 이후부터 그녀에 대한 나의 사고가 전연 다른 곳으로 끌고 갈 줄이야 정말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미 그녀에 대한 관계는 추측해 알 수는 있었지만 기대에 대한 밀려오는 실망과 깊지는 않지만 어떤 분노 같은 것도 함께 느껴지고 있었다. 이리도 아름다운 꽃을 긴 세월 동안 사내들이 꺾지 않고 그냥 두었을 턱이야 없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미웠다. 아름답고, 고귀하고, 우아한 한 송이의 목련 같은 그녀가 바로 이 순간 내 마음속에는 생명의 줄기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한 한쪽 잎이 시들어 버린 꽃이 되었던 것이다.
“실망했죠?”
그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순간에 실망과 분노로 갈등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함도 없고 오직 바라보는 내 마음만 변했는데.......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무척 간사하다고 말들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지금 그 옛날 고교시절에 그녀를 사랑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왜 지금 이 순간에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애타게 그리웠던 한 여인을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꿈과 같은 현실과 이미 예상한 일이지만 자신 외에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실망이 교차되는 순간에 참다운 그녀를 아쉬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순간에 모든 가치는 마음에 따라서 좌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에 번개같이 스쳐가는 그 옛날 광창의 세계, 마음이라는 창틀 속의 세계, 그것이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다웠던 세계가 아닐까. 행복은 늘 추억을 생각하는 과거 속에서만 존재하는 첫사랑인 것처럼...
사람들은 첫사랑은 그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과 결실을 맺고 난 후에도 첫사랑은 순수한 처녀 적의 그리움으로 남자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존재한다고 한다. 과연 나의 이 첫사랑의 여인은 결혼으로 영원히 이어 질 수가 있을까?
3
무척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이야기는 그녀를 소유했다는 정복감과 처음 가졌던 그녀의 순수함에 대한 실망 다음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밤 젊은 나는 두려움 속에서나마 조심스럽게 그녀를 소유하자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는 그녀가 내 여자라는 자신감 말이다. 침착하게 나는 입었던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아직 술이 덜 깼는지는 모르지만 그녀 또한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나의 행동을 받아 드리고 있었다. 차례로 그녀의 옷이 벗겨지고 이제는 오직 브래지어와 펜티 그것뿐이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볼 사이에 살며시 넣고 내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있는 그녀의 속눈썹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모은 두 팔 사이에 눌려버린 앙증맞은 그녀의 아담하고 귀여운 젖무덤은 목과 가슴사이에 깊은 계곡을 만들고 있었고 앵두 같은 젖꼭지는 팔꿈치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없는 공상의 세계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는 귀를 살짝 덮으면서 반대편 어깨사이로 유선형의 소용돌이 같이 감겨서 묻혀 있었다. 더러는 어깨 밖으로 반짝이는 융단같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조금 전의 숱한 실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희열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는 효용의 법칙이 아닌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한계 효용 체증의 법칙으로 바뀐 것이다.
“비너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정말이지 이리도 옥 같이 맑고 깨끗한 피부와 부드러운 곡선의 나신을 바라보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는 터질 뜻한 탄력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정 그녀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바로 비너스가 아니면 나를 유혹하는 악마의 여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너무나 아름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바로 전에 그녀와 한 몸을 이루었는데도 지금은 그녀에게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극치를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 아니겠는가.
초등학교 3~4학년 도덕 교과서인가, 아니면 국어 교과서에서 대동강이란 제목에서 본 기억이 난다. 고려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시랑, 한림학사 등을 지낸 김황원은 본관은 광양(光陽)이고 자는 천민(天民),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가 어느 날 대동강 부벽루를 오르게 되었다. 부벽루에 올라 고금의 제영(題詠)들을 보니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생각에 차지 않았다.
“허허, 저 아름다움을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을꼬?”
그는 현판들을 하나하나 불사르고 자신이 멋진 글을 쓰겠다고 붓을 잡았다.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그는 단숨에 아름다운 대동강의 풍경을 써 내려가다가 그만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은은히 흘러내리는 대동 강물과 마주하는 넓은 들판과 아름다운 강산....... 아름다운 여인의 손길 같은 미풍이 살며시 그의 볼을 더듬다가 입 맞추고는 사라지고 있었다. 잡아보려도 잡히지 않는 마음의 연인은 선비의 마음에 여울을 남기고 또 한 번 왔다가 사라진다. 그의 붓끝은 움직일 줄 모르고 그냥 그대로 한없이 이 아름다움에 취해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벅찬 감동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는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경험했으리라. 하물며 문학과 학문에 대가인 그의 심정에서는 오죽했겠는가. 그가 본 아름다움을 글 속에 담으려 해도 결코 담지 못한다는 자신의 한계를 한탄했던 김황원은 밤이 새도록 그대로 그렇게 통곡했다는 일화가 있다.
내가 그녀의 모습에서 느낀 바로 이 순간이 이것이었다.
나는 그녀와 처음 가까이했던 소나기 오던 당북동 그 광창아래서의 황홀한 순간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지금의 현실을 더 빨리 직시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솜털 같은 부드러운 머리를 걷으면서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끌어 다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젖무덤이 내 가슴으로 겹쳐 오는 것을 느끼면서 꼭 껴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당할 수 없는 가슴은 한없이 쿵쿵거리고 온몸은 열로 가득했다.
“몸이 무척 뜨거워요.”
그녀에게도 내 뜨거운 열기가 나의 피부를 거쳐 그녀의 피부 깊숙한 곳으로 전달되었다. 나는 보석보다 더 귀한 그녀를 한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힘껏 가슴 깊이 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 퍼지는 재스민 향과 같은 은은한 향기가 나의 코끝을 운무와 같이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새삼스러운 아름다운 육체의 향연에 취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뼛속 마디마디에 스며드는 향기로 인해 온몸이 녹아내리는 용광로 속으로 빠져 들어가 숨이 멈추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몸속으로 나 자신의 온몸이 던져져서 깊고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몸속에 힘이란 힘은 하나도 남김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뼛속 마디마디가 식초에 담긴 물체와 같이 흐물흐물 녹아내린 뜻한 느낌이 들면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겨우 찾아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두 팔은 나의 온몸을 불살라 버리려는 듯이 강한 힘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한없이 사랑이란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 이 순간, 사랑 이상의 말을 도저히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크고 긴 격동의 순간은 내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이 한 밤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밖에서는 사르륵사르륵 눈이 내리고 있었다. 끝도 없는 듯이 보얀 눈은 내리고 있었다.
새벽에 잠든 나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들었다. 밝은 햇볕이 미닫이 두문 사이로 환하게 얼굴에 와 부딪혀오자 눈을 떴다. 갈증으로 목이 타 오르고 있었다. 어젯밤 일이 꿈이었던가.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곱게 접은 분홍색종이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나는 얼른 종이를 펴 들었다.
“신의 도움으로 우연히 만났지만 아직도 저를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나리라 결심했습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부디 행복하시길....... ”
다음날도, 또 다음 날도 그녀의 모습은 영영 보이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