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hyun Jun 14. 2020

회사 한정 현명하게 화내는 매뉴얼

철이 들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화는 내봤자 본전도 못 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돌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화나게 만드는 일은 예전보다 다양해졌으면 더 다양해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지능적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변조되어 나를 시험했다. 그래도 짬밥을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닌지, 연차가 쌓이면서 그런 소소한 상황들은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 법을 터득했다. 그냥 삭히기, 짧게 괴로워하고 치워버리기, 욕하고 털어버리기, 답 없는 문제엔 생각을 꺼버리기 등이 나의 피, 땀 눈물을 흘려 얻은 요령이다.


근데 가끔 ‘out of control’ 또는 ‘야마가 돈다’라는 표현을 써야 할 정도의 분노를 느낄 때가 있다. 소심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냥 삭히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너무 답답했다. 나만 괴로워했고 원인제공자는 태평했다. 내가 아무리 소심해도 짚고 넘어가야 할 때가 있었다. 친절한 사람은 되고 싶지만, 호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느낀 감정을 상대방에게 현명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뭘까 고민했다. 성숙한 어른은 화가 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생각해봤고, 부분 부분 나의 경험을 보태 이를 매뉴얼로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회사 한정 현명하게 화내는 매뉴얼

1. 상황 발생

일단 상황이 발생한다.


2. 부정적인 감정 인지

그러면 뭔가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솟구친다. 아직 뭔지 모르는 감정이 어지럽게 일렁일 수도 있고, 분노가 불처럼 활활 타오를 수도 있다.


3. 일단 정지

이를 알아채면 무작정 퍼붓기보다 일단 멈춰서 생각을 한다. 근데 이게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유부단해 보일 수도 있고, 생각하느라 화낼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 벌어진 순간 나의 감정을 가볍게 표현하면 상대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적당한 타이밍에 화내기!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회생활 고수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의 감정을 컨트롤도 할 수 있고, 불쾌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수인 나는 화가 나면 먼저 말문이 막히고 멍해진다. 그리고 임기응변에 능하지도 않아서 당장 화를 낸다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이기 때문에 타이밍을 못 맞춰도 신중해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이밍보다 신중함을 택했다.


4. 감정 파악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히 정의 내려야 한다. 상황이 복잡한 경우 부정적인 감정은 드는데 이게 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 감정을 나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게 분노인지, 슬픔, 실망, 미움, 짜증, 권태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불안이 묻은 분노처럼 복합적인 상태일 수도 있다.


5. 사건의 본질 들여다 보기(인과관계, 분노의 대상, 나의 과실)

그런 다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원인이 뭔지 생각해본다. 인과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가 복잡하게 꼬여있을 수도 있으니 그걸 풀어서 봐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분노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또한 나의 과실은 없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6. ‘정당한 화’가 맞는지 자문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당한 화인가, 지금 이게 화를 낼 상황이 맞는지 생각해본다. 확신이 들면 시간을 두고 몇 번 더 생각해보자. 어차피 화낼 타이밍은 놓쳤다. 급할 건 없다. 신중해지자.


7. 화가 난 이유 설명

몇 번 더 생각을 해도 화가 난다면 이제 화를  때이다. 근데 소리를 지르거나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마음속에 타오르던 불은 좀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상대방에게 차분히 설명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큰소리를 내거나 극단의 상황을 거치지 않고도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


8. 결과

이렇게 말했을 때 대부분 상대방이 사과를 하거나 앞으로 이런 일이 없게 주의하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서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대화로 풀고 잘해보자며 마무리를 하게 된다. 이것이 나름 해피엔딩이라면, 반대의 엔딩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얘기를 했는데도 상대가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관계에 미련이 없을 것 같다.






이것이 현명하게 화를 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순간에 매뉴얼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이상일뿐 성공한 적이 드물다. 보통 처음에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버리거나 이런 긴 과정을 거치면서 화내는 걸 포기하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아직도 참는 게 좋은지, 화를 내는 게 좋은지 모르겠다. 어떤 건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나았고, 어떤 건 한 번쯤 꼭 짚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그래도 화를 낸다면 숙고하고 내는 편이 후회를 덜 남겼었다.


사실 이 글을 며칠 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쓰는 도중에 꽤 크게 화가 나는 일이 생겼다. 몇 번 더 생각하는 중이지만, 화를 내는 게 맞는 것 같다. 타오르던 불은 사라졌지만 혼자 생각한다고 풀리진 않는다. 화를 내는 것도 참는 것도 힘든 일이다.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이 원망스럽다. 성숙한 어른이란 무엇일까. 정말 어렵다.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매뉴얼에 '회사 한정'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회사 사람들은 아무래도 어렵고 예의를 차려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치만 사실 회사에서도 잘 지켜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먼 사람일수록 적용이 되는데 가까운 사람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 더 예의를 차리고 잘해줘야 하는데 정말 역설적이다. 정작 이 매뉴얼은 가장 소중한 내 옆사람에게 지켜야 할 매뉴얼인 것이다.






2020. 6. 9.


매거진의 이전글 비자발적 집순이 생활(feat. 코로나바이러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