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아무도 없는 거실 빈 공간에 울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씨네 토크팀에서 6월 영화를 선정하기 위해 투표에 빨리 답하라는 내용이다.
한 달에 한 번 상업영화가 아닌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인데
막상 만나면 영화 이야기보다는 신변잡기나 넋두리로 대화가 흘러간다.
그래도 영화 선정 과정 중에 꽤 좋은 영화들의 정보를 알 수 있어 가랑비 옷 젖듯이 모임에 스며들고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들었던 영화사 수업의 여파로 찾아낸 모임이다.
영화 선정에서 소개되는 수많은 영화 중에 우선순위로 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집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래서 6월에 선정된 영화는 네이버 검색으로 볼 수 있는
“안녕, 소중한 사람”이었다. 프랑스 영화로 2023년 개봉작이고 깐느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작이다. 안녕, 소중한 사람이라는 제목에서 멜로를 기대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죽음을 다룬 영화였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포인트는 죽어가는 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코 앞에 둔 젊은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보다는 본인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위로받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고민 끝에 가족을 떠나 홀로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지역에서 생을 마칠 것을 결심한다. 그녀와 함께 병원으로 돌아가 치료에 전념하고 싶어 하던 남편을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의 갈등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중에 문득 20년도 더 전에 보았던 프랑스 영화가 내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 때문에 아직도 기억하는 영화인데 그 당시에는 크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었다.
제목은 “time to leave”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작품이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찾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찾을 수가 없다.
출세 가도를 달리던 젊은 그는 느닷없이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치료를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한다.
사랑하는 동성 애인과 가족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홀로 여행길에 오른다.
“내 죽음이 너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게 싫어”라는 대사가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불임부부에게 자신의 정자를 제공한다. 그리고 해변가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리를 잡고 눕는다.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자기 자신의 어릴 적 환영을 쳐다보다 서서히 날이 저문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그리고 마침내 혼자만이 모래에 누워있다. 그는 일어나 핸드폰을 바다로 집어던지고 거의 알몸의 상태로 해변에 누워 홀로 죽음을 맞이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가 다아 끝나고 엔딩 장면의 여운에 넋 놓고 앉아있다 보니 밖으로 나가 걷고 싶어졌다.
이건 내가 혼란스럽거나 마음이 복잡해지면 일어나는 전조 증상이다.
영화는 그동안 내가 알던 시한부 인생을 다룬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내용들이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방식이 병원이나 요양원이나 가족과 함께여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 속에 그녀는 본인의 선택이 이기적인지 계속 고민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삶이 있으며 취향도 있음을 우리는 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법 속에 죽어가는 사람을 포함시키는 것과 죽어가는 자가 스스로의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 중에 누가 더 이기적인 것이냐?라고 영화는 묻는 것 같다.
아버지, 엄마, 큰오빠, 작은 오빠, 그리고 나!
다섯 명의 나의 원가족 중 세 명은 나와는 다른 차원에 있고 존재 여부를 모른다.
뿐만 아니라 빛바랜 흑백사진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던 열 명의 친인척들 중에 다섯 명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이른 나이의 큰 오빠만 사고사였고 모두 질병사였다.
15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내게 들이닥친 일이다.
또한 주변 친구들은 요양원에 계신 부모님 간병으로 하소연이 끝이 없다. 집집마다 스토리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몹시 괴롭다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은 성큼 다가와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지만 사실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다.
예전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되면 시험공부 계획을 세웠었다.
계획대로 지켜서 성공적으로 시험을 치른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계획이 있는 경우가 없었던 경우보다는 결과가 좋았다. 죽음도 계획을 세워보는 건 어떨까? 계획이 없는 것보다는 주도적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한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함이 전제된다. 여기서 꽉 막힌다.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모호하고 두렵다.
확실한 건 내가 죽게 되면 항상 내 곁에 공기같이 존재하던 나의 모든 일상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가족, 이웃, 친구를 비롯해서 불편하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했던 모든 관계들이 끝나고 내가 좋아하던 산책, 햇빛, 나무, 사진 찍기, 영화 보기, 쇼핑,
그리고 청소, 설거지를 비롯해서 내가 싫어했던 것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둘러싼 지속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겨웠던 일상들이 소중하다는 깨달음이 아주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것이 도를 닦는 것인가?
주도적으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
필요하다면 계속 도를 닦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