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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예윤 Sep 12. 2022

세부에서

혼자서 여행하는 일은 때로 지독하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던질 사람도 없으며, 말을 하지 않으니 생각 속에 잠기게 되고, 그 생각이란 것이 종국에는 나를 우울로 데려가는 일이 아주 잦아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거나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주 혼자서 여행을 가곤 하는데, 여행을 떠나려고만 하면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왠지 여행을 같이 갈 만큼은 친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고, 그 기준에서 살아남은 친구와도 일정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고, 가족들은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거나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에도 나는 홀로 여행을 계획했다.

 세부라는 여행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아마 고등학교 즈음이었을 것 같은데, 당시 대학생이던 우인이 졸업여행으로 세부에 가서 올린 사진과 이야기를 봤었다. 이번에 우인에게 세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언니 가본 적 있지 않아?” 라고 하니 그걸 기억하냐면서, 대학 때 친구들이랑 여행 가서 스노클링도 하고 관광지도 가고 그랬지, 했다.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코로나에 확진된 지 45일이 안 되어서 양성이 다시 뜨게 되어도 재검출로 판정돼 격리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코로나력으로 이제 3년이 되어 해외에 정말 좀 가고 싶어서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3박 4일의 연휴에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역시 동남아였고, 베트남은 다낭에 친구를 만나러 두어번 갔었기에 다른 여행지를 고르다가 무의식 속에서 피어오르듯 생각난 곳이 세부였다. 비행기로 4시간 반 거리였고 마침 티웨이항공에서 연휴 첫날 점심 때쯤 도착하는 비행기를 운행하고 있었다. 별로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간단히 예약했다. 사실 항공권이 꽤 비싸서 그렇게 간단히 예약할 액수는 아니었지만, 마침 충동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했고, 해외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애가 3년을 못 가고 있었으니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세부에 왔다.




첫째 날


세부에는 시내인 세부 시티가 있고, 공항이 있으며 리조트가 몰려있는 막탄 섬이 있는데, 나는 세부 시티의 래디슨 블루와 막탄 섬에 있는 리조트들 중에 고민하다가 결국 막탄 섬의 플랜테이션 베이 리조트를 예약했다. 더 유명한 샹그릴라에는 한국인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나는 리조트에 오자마자 세부 시티의 래디슨 블루를 선택하지 않은 결정을 후회했는데, 리조트엔 정말 리조트 사람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심이 좋고 세부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따로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리조트 내에선 그게 불가할 것 같았다. 리조트 내부에는 수영장과 프라이빗 비치가 있고 나무가 우거져서 아름답긴 했지만 수영장을 둘러싸고 있는 가짜 암석들이 굉장히 거슬렸다. 마치 가짜임을 숨기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곳에선 별로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한 나는 리조트를 좀 어슬렁거리다가 그럼 차라리 세부의 최고급 마사지라도 받아보자, 하고 냅다 리조트 내 마사지 샵인 모감보 스프링스의 스웨디시 마사지를 예약했고(오일은 일랑일랑으로 선택했다. 가장 좋아하는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에서 원료로 일랑일랑을 쓰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이다), 마사지 전 약 2시간 동안 그냥 숙소에서 뒹굴면서 기다렸다. 마사지는 6시였는데 1시간 전에 와서 내부 스파를 이용해도 된다고 했다. 5시 즈음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고 일단 맥주를 살짝 마셨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모감보 스프링스로 향했다. 안에서 핸드폰을 이용할 수가 없어서 리셉션에 핸드폰을 맡기고 안에 들어가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일본의 자쿠지처럼 되어있는 탕에 들어가 있으니 따뜻한 차를 내줬다. 물이 그리 뜨겁진 않았는데,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면 금세 머리가 아파지는 나에게 딱 알맞은 온도였다. 차를 마시면서 몸을 탕에 담그고 있으니 서서히 해가 저물었다. 마사지가 6시였고 내가 5시 좀 넘어 들어갔으니까 50분쯤 스파를 했을 텐데, 핸드폰도 시계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탕에 들어가 있으니 처음에는 좋고 점점 심심해지다가 나중엔 졸렸다. 마침 스파를 이용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미지근한 물이었긴 해도 오래 들어가 있으니 머리가 띵해져서 탕을 나와 타월로 몸을 감싸고 선베드에 누워 있었다. 해는 져 가고, 은은하게 밝아오는 노란 불빛을 보며 혼자 멍하니 앉아있으니 마치 명상하는 것 같았다. 요가하러 가서 사바아사나 할 때도 눈을 제대로 못 감고 계속 반사적으로 부릅뜨던 난데, 그 노란 불빛 아래 눕는 듯 앉아 있으니 생각이 사라졌다. 빈 상태. 좋았다. 거의 잠이 들까 할 때쯤 직원이 나를 데리러 왔다. 스파 너머로 좁게 난 길을 따라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작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곳으로 안내 받았다. 작은 방이었고 침대가 두 개 있었다.

 마사지는 아팠다. 내가 하드하게 해달라고 주문을 했기 때문에 별달리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조금만 압력을 줄여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말을 못했다. 이놈의 수줍은 성격. 침대에 얼굴 모양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아래에 아로마 오일을 놔줘서 조금 더 편안하게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마사지를 받고 나서 수기로 적는 리뷰에 모든 것이 좋았다고 쓴 후(그렇다. 나는 익명으로 쓰는 후기에서도 아팠다고 하지 못했다)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방을 나왔다. 스파로 돌아오니 차를 다시 준비해줬는데 이번엔 좀 미지근했고 나는 차를 빠르게 마신 후 방으로 돌아왔다. 첫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날밤은 금세 잠들 수 있었다.




둘째 날


둘째날이 밝자 나는 이대로 리조트에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수영을 할 줄 알았다면 스노클링을 하러 가도 됐을 테지만 난 물을 무서워했다. 리조트는 말 그대로 리조트일 뿐이었다. 세부시티에 가서 사람들 사는 걸 보고 싶었다. 그랩을 켜서 택시를 불렀다. 당연히 플랜테이션 베이까지 오는 택시가 쉽게 잡힐 리 없었다. 호출을 켰다 껐다 하며 20분 정도를 기다리자 겨우 택시가 잡혔다. 나는 세부의 대표 관광지인 산 페드로 요새에 갈 생각이어서 산 페드로 까지만 치고 그랩 목적지 목록 중 가장 위에 떠있는 장소를 선택했다. 택시가 출발했고, 나는 90페소를 더 내지만 좀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고속도로로 가겠다고 했다. 가는 동안 길거리의 사람들과 상점들을 보았고 그 가게들 처마에 바나나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약 40분 후에 도착을 하기는 했는데, 거긴 산 페드로 뭐시기이기는 했지만 산 페드로 요새가 아니었고, 택시기사는 여기가 맞냐고 하면서 혹시 산 페드로 성당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했고, 나는 요새와 성당을 헷갈려서 성당이 맞는 것 같다고 했고, 새로 목적지를 설정해서 갔는데 엉뚱한 곳이었고, 내리기 직전에 사실은 내가 ‘Fort’ San Pedro에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나 두 번이나 목적지를 잘못 얘기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일단 내렸다. 어떻게 요새랑 성당을 헷갈릴 수가 있지. 성당 앞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나는 조금 둘러보다가 그랩을 다시 켜서 ‘Fort San Pedro’를 제대로 입력하고 택시를 기다렸다. 세부에는 산 페드로 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참 많으니 주의할 것.

 세부 시티의 관광지로는 산 페드로 요새와 산토니뇨 성당을 봤는데 두 곳은 5분 거리에 있고, 사실 별로 볼 게 없었다. 원래 내가 관광지에는 큰 관심이 없기도 하고 뭐든지 빨리 보고 말아버리긴 하지만 두 개 관광지를 30분 내에 다 봐버렸으니 좀 허탈할 만도 했다. 조금의 기대를 하고 찾아간 크로아상이 맛있다는 무슨 프렌치 베이커리도 기대 이하였다. 그리고 사람들 사는 게 어떤지 보려고 거리를 걷기에는 정말 너무 더웠다. 결국 시원한 아얄라 몰에 가서 마트의 과일 코너를 조금 둘러보다가 (과일 코너가 어마어마했다. 아래 사진을 첨부한다) 건망고 13봉지와 산미구엘 2캔, 레드호스 2캔을 사고 리조트로 돌아왔다. 리조트에서 나선 것이 8시반 쯤이었는데, 돌아오니 12시반이었다. 왕복 1시간 반쯤 걸렸으니까 시내에는 2시간 반쯤 있었던 거다.

 이상하게 세부에 오니 갑자기 일본에 가고 싶어졌다. 일본에 못 가니까 세부에 온 것처럼 느껴진 건가.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고 갑자기 도쿄와 교토가 너무 그리워져서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일본을 드나들려면 일본어를 좀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중급에서 멈추고 있는 실력이 안타까웠다. 리조트에서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시사일본어인강을 발견하고는 적당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황영아 선생님의 바찌리 N3 문법강의. 그걸 듣고 있으니 시간이 훌훌 지나갔다. 룸서비스로 햄버거를 시켜먹었는데 인터넷 리뷰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정말 맛없었다. 밥이 맛 없으니 우울해졌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대학 때부터 해가 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우울했다. 캠퍼스의 운동장 저편으로 지는 태양을 보며 왜 이렇게까지 죽고 싶은 걸까, 하고 생각했던 풍경이 떠올랐다. 엄마한테 연락했다. 우울해. 그러자 엄마가 우문현답을 줬다. 조금 우울한 것도 괜찮은 것 같아. 쓸쓸함도 일종의 고급 감정이라고 생각해. 어떤 말인지 금방 파악이 됐다. 너무 바쁜 일상에 쫓기거나, 깊게 사유할 여유가 없다면 우울함이나 쓸쓸함도 느끼지 못할 터. 그 말을 들으니 순식간에 마음이 괜찮아졌다. 그러고 나서 9시부터 잤다. 마음도 편해지고 할일이 없어서인지 잠이 솔솔 왔다. 불을 켜고 자다가 어느 순간 불을 다 꺼버리고 또 잤다. 이상하게 세부에서는 잠이 심하게 잘 왔다.




셋째 날


셋째 날도 세부 시티에 가야 했다. 한국에서 미리 찾아놓은 Tales and Feelings라는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놨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 일본어강의를 몇 개 보고, 씻은 후 택시를 탔다. 식당은 건물 2층에 있었고, 매우 작았다. 말끔하게 정장을 입은 웨이터가 주문을 받았다. 나는 따뜻한 카푸치노와 참치 샐러드, 랍스터 먹물 파스타를 주문했다. 참치 샐러드가 맛있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랍스터 먹물 파스타는 정말 별로였다. 랍스터는 살이 거의 없었고 파스타는 너무 푹 익어 있었으며 소스 맛도 좀 애매했다. 카푸치노만 한 잔을 더 마시고 빠르게 나와 택시를 타고 그냥 리조트로 들어왔다. 돌아올 때 탄 택시는 너무 낡아서 가속을 할 때마다 엔진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대체 얼마나 굴린 차야. 이러다 길거리에서 퍼질까 무섭기도 했지만 그 차가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잘 도착해서 보니 내 방은 객실정비 중이어서 리조트를 자전거를 타고 한바퀴 돌기로 했다.

 리조트는 넓어보이지만 걸으면 15-20분 내로 한바퀴를 다 돌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빨간색 자전거를 빌려 탔는데 핸들을 조금만 꺾으면 발에 바퀴가 부딪히는 이상한 자전거였다. 리조트에 들어온 후 한번도 가보지 않은 프라이빗 비치엘 갔다. 풍광이 멋졌다. 이런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다면 내 성격이 좀 달라질까 생각했다. 바다 근처에서 자란 사람은 어딘가 마음 쓰는 법이 다를 거라고 대학 때부터 막연히 생각해왔다. 선베드에 누워서 경치를 좀 보다가 탈 것 같은 햇빛에 일어났다. 모감보 스프링스에 가서 그날 저녁에 받을 마사지를 또 예약하고, 얼른 숙소로 들어왔다. 마사지 체험이 충분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여행 마지막 날 저녁에 밀려올 우울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다른 일로 생각을 흩뜨리려는 계획이었다. 이번엔 스웨디시 마사지가 아닌 모감보 스프링스의 시그니처 소프트 마사지를 예약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인조동굴을 나오다가 동굴의 끝에 나무가 우거지고 차가 한 대 서 있는 사진을 찍었는데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하늘이 시원하게 파랬다.

 또 인터넷 세상을 여행하다가 일본의 마쓰이에 마사시라는 작가를 알게 됐는데 조선과 한국일보에서 쓴 인터뷰 기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라는 소설은 무려 '소에지마 하지메는 소실점을 등지고 있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지 않는가. 특히 한국일보에서 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멋져서 옮겨둔다. “소에지마 하지메는 소실점을 등지고 있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사라질 준비. 그것은 큰 고리를 중간 정도의 고리로 줄이는 일, 작은 고리를 중심을 향해 더욱 축소해가는 일, 고리였던 것은 결국 점이 되고 그 작은 점이 사라질 때까지가 그 일이었다.”라는 끝에 다다른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태어났고 끝내 사라질 그 소실점을 향해서.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 소실점에 관한 모든 이야기다. 침대에 모로 누워 박수를 쳤다. 작가는 20대에 등단을 한 후 편집자로 일하다가 54세에 사실상 데뷔작을 내놓았는데 그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고 했다. 마침 교보에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e북이 있길래 일단 사서 읽기 시작했다. 첫 챕터부터 문장이 유려했다. 상쾌하다 라는 형용사를 인물에게 쓰는 것이 신기했다. 한 문장씩 음미하며 읽다 나도 글을 좀 쓰다가 시간이 되어 마사지를 받으러 모감보 스프링스에 갔다.

 하드 마사지를 받는 동안은 1시간이 길게 느껴졌는데 소프트 마사지는 달랐다. 이제 좀 하나 싶으니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후기에 좋았다고 썼다. 어쨌든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좋았으니까. 마지막 밤이니 맛은 없어도 뭘 먹어야지 싶어서 킬리만자로 카페에 가서 파스타와 초코 퍼지를 시켰다. 리조트 내부 식당이라 그런진 몰라도 정말 짜고 맛이 없었고, 많이 남겼더니 혹시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냐는 질문을 들었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 정말 난처해지는데 배가 별로 안 고프기도 했지만 실제로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괜찮았다고 했다. 이럴 때 음, 별로였어요 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까. 가끔 내가 너무 무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음식에 장난을 친 것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정말 별로였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둘째 날에도 킬리만자로에 와서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미듐 레어로 시켰음에도 웰던 같은 고기가 나와 실망했었다. 셰프인 친구는 그걸 듣고 리턴해! 라고 했지만 나는 마사지 압 세기도 조절해달라는 말을 못하는 사람 아닌가. 그냥 먹었다. 칼이라도 날카로운 걸 주든지. 나 자신이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렸을 땐 딱 잘라 거절 잘 했던 거 같은데. 갈수록 사람이 물러진다.

 방에 왔더니 옆방에선 거의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 여자들이었는데 여럿이 와서 그런지 잔뜩 신이 나 시끄러웠고 방음이 너무 안 돼서 크게 말하는 소리는 다 들렸다. 침대에 눕듯 앉아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를 계속 읽었다. 다케시가 죽을 땐 울기도 했다. 1/3쯤 읽고 나서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항상 그랬다. 여행 가기 전날과 여행 마지막 날은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여행 가기 전날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설레서 잠이 안 오는 것이고 여행 마지막 날은 돌아가서 출근할 거 생각하니 착잡해서 잠이 안 오는 것인지. 하나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맥주 작은 캔이 3개쯤 있어서 다 입 속으로 부어버렸는데도 잠이 안 와서 여행기를 썼다. 3시간을 자고 따가운 햇빛에 눈을 뜨니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돼 있었다.




돌아가는 날


3시간 밖에 못 자 잔뜩 피곤한 상태로 공항에 와서 수속을 마쳤다. 면세점과 음식점이 있는 코너로 들어왔는데 영업하지 않는 가게가 많았다. 코로나의 여파로 인한 것인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유령도시 같다고 생각하면서 뭘 먹을지 좀 둘러봤는데, 믿었던 버거킹 마저 영업을 그만둔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라멘가게로 가서 맥주와 교자와 차슈라멘을 시켰다. 금방 음식이 나오기는 했는데, 캔에 담긴 맥주를 빼놓고는 정말 먹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교자는 냉동한 것을 그냥 녹이기만 한 것 같았고 라멘은 면이 퉁퉁 불어 있었으며 어울리지도 않는 당근이 올라가 있었다. 맛이 끔찍했다. 나는 국물과 맥주만을 조금 마시고 전부 반납해버렸다. 이렇게 맛없는 음식은 살면서 처음 먹어본다고 생각했다.

 들어오고도 또 이민국을 거쳐야 한다고 해서 수속을 2차로 마치고, 큰 창 앞에 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를 아껴 읽으려고 어젯밤 인터넷 서핑을 하며 발견한 책을 다운 받았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이라는 책인데 암으로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편지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이것도 일본 책이었다. 이번 세부 여행에서는 돌연 일본어공부도 시작하고 일본 책도 두 권이나 읽는구나. 내친 김에 일본 록 가수 아이묭(Aimyon)의 음악도 틀었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의 철학자의 첫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현재 자신의 인생과 전혀 다른 삶을 상상해보는 것. 저는 여행에서 느끼는 묘미가 그런 상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럼에도 전혀 다른 인생의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생각의 실마리를 주는 듯합니다. 플랜테이션 베이의 프리이빗 비치에 앉아 이런 풍경을 평소에 보고 살면 어떨까 상상했던 게 떠올랐다. 요즘 내 생활에 많이 불만족했던 것, 그래서 여행이 필요하다 생각했던 것도. 혼자 여행하며 쓸쓸한 순간도 있었지만 사색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고 앞으로 내 생활을 어떻게 꾸리면 좋을까에 대한 나름의 실마리도 얻은 것 같았다. 일단 좋아하는 일을 더 꾸준히 하고, 글을 성실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한국에서도, 여행을 떠나지 않은 순간에도 마치 여행을 떠난 듯한 상쾌하고 산뜻한 기분을 자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러면 내 인생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비행기 이륙까지는 이제 30분. 익숙한 그 풍경으로 돌아간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때까지, 내 생활에 만족하며 지낼 수 있길 바란다.


산 페드로 요새와 산토니뇨 성당



마트 과일 코너의 과일들



발코니로 난 문을 여면 보이는 풍경. 친구가 이 사진을 보더니 "넌 손목에 수평조정기 달았냐" 라고 했다.


프라이빗 비치의 바다와 동굴에서 나왔을 때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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