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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Oct 17. 2020

윤희에게

건강도 친구도 있을 때 잘 지키자

윤희야, 추석 잘 보내고 있지? 내내 집에만 있다가 너무 답답해서 동네 카페에 왔어. 다들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나도 마스크를 쓴 채로 너에게 편지를 써.


얼마 전에 나는 허리 MRI를 찍고 왔어. 허리 통증이랑 다리 저림이 요즘 통 심해졌지 뭐야. 몇 년 전에 운동을 하다가 골반에서 뚝! 소리가 나더니 그 뒤로 그 주변이 조금씩 아팠었거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간지러운 고통이어서 모르는 척했더니 어느새 점점 커져서 몇 주 전부터는 누워있어도, 앉아있었도, 심지어 걸을 때에도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린 거야. 순간 디스크인가 싶어서 정형외과에 가서 CT를 찍었는데 CT상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대. 근데 내 통증이 디스크 환자 통증이랑 비슷해서 MRI를 찍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얼마 전에 MRI 비용이 좀 저렴하다는 검진센터를 하나 찾아서 찍으러 다녀왔어. 아직도 그냥 근육에 신경이 눌려서 저린 거라는 희망을 품고 고집스럽게 큰 대학병원에 가지 않았어. 내가 뭐 했다고 이 나이에 디스크 환자가 되냐고. 조금 억울하잖아.


어쨌든 사람이 엄청 많았던 그곳에서 거리 두기는 지키지 못한 채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데 그날 내가 핸드폰을 안 가져갔었거든. 그래서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했어. 어디를 가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할아버지. 신분증 보여달라는 직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 내가 앉아 있던 자리라고 서로 싸우는 아주머니들, 씨발 사람이 졸라 많다고 큰소리로 통화하던 젊은 남자, 유모차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젊은 엄마, 기다림에 지쳐 네 명이 앉을 자리를 가로질러 누워버린 아주머니. 그 안에서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더라고. 핸드폰을 안 가져가서 음악도 못 듣고 애니팡도 못 하는데도 시간이 금방 가더라. 종종 핸드폰을 부러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실비를 청구하려고 의사 선생님이랑 먼저 진료를 예약했거든. 오래 기다려 들어간 그곳엔 마치 AI가 앉아있는 것 같았어. 그거 알지, 완전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 있잖아. 아무 감정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 허리 아프세요? 언제부터 아팠어요? 아이고. 이거 적어드릴 테니 앞에 간호사분에게 주면 안내해 드릴 거에요. 이게 다였어. 1분은 걸렸을까? 심지어 아이고라는 추임새에도 아무런 감정이 안 느껴지더라고. 마치 통증 XX 년 이상이면 아이고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끔 프로그래밍이 된 것 같았어. 쨋든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고 5층으로 내려가서 간호사 말대로 팬티만 입고 다 벗은 뒤 검사복으로 갈아입었어. 꼭지가 두드러지진 않았는지 세심하게 확인한 후 나와서 나는 내 차례를 기다렸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이 큰 소리로 불렸고 나는 드디어 MRI 기계에 누웠어. 기계 안에 들어가면 엄청 시끄럽다고 검사해주시는 선생님 두 분이 양쪽에서 내 귀에 귀마개를 꽂아주더라고? 목도 못 움직이게 양 귀 옆을 꽉 고정했고.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다가 머리 고정한다고 무슨 스펀지 같은 걸로 꽁꽁 둘러 싸맸는데 검사해 주시는 선생님이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거야. 아마 주의사항을 말해준 것 같아. 근데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려서 내가 안 들려요 라고 했는데 그 선생님도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뭐라고 그냥 계속 말해 나는 계속 안 들리고. 근데 그 와중에 내 몸은 그 기계속으로 점점 들어가고 있는 거야. 속으로 욕했거든. 뭐라는 거야 씨발. 아무 생각도 없다가 갑자기 내가 뭔가 중요한 걸 못 알아듣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리는 거야. 그 선생님이 중요한 걸 말했으면 어떡하냐고. MRI 찍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던가?


다 들어가고 나니 마치 내 체격보다 약간 큰 하수구에 낀 모습이 됐어. 내 눈앞엔 바로 벽이 있고 양쪽 귀에선 쿵쿵거리는 큰 소리가 나고 마스크 때문에 답답하고 갑자기 너무 숨이 너무 가쁜 거야. 어떡하지? 이 기계를 주먹으로 쾅쾅 쳐야 하나? 그러면 꺼내주나?


근데 막 또 그러면 이거 다시 해야 하는데 완전 귀찮잖아. 눈을 뜨고 진정해 진정해 하고 있는데 눈앞에 있는 벽에 자세히 보니 아주 작은 점이 하나 있는 거야. 기계에 상처가 난 건지 일부러 찍어 놓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걸 보기 시작했어. 그것만 보고 다른 건 시야에서 지워버리니 갑자기 안정되더라고. 심지어 조금 지나니까 약간 잠이 오더라? 그러다가 정신을 딱 차리면 또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고. 그러면 다시 점을 째려봤어.


나는 우주 비행사다.. 지금 나는 먼 우주로 가고 있다.. 난 아주 멋진 한국 최초의 여자 우주 비행사다.. 이 정도의 흔들림, 이 정도의 중력은 가뿐히 참을 수 있다.. 씁씁.. 후후..


‘ㅊ..ㅊㅊ..ㅊ칙.. 네~ 잘하고 계세요~ 계속 허리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계세요~”


기계 안 스피커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어. 개 쩌는 우주 비행사의 감정선이 잠시 깨지긴 했지만 난 무사히 MRI를 찍고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어.


난 다시 내 옷으로 갈아입고 허리 MRI 사진을 CD로도 받아왔어. 추석 연휴가 껴 있어서 결과는 다다음주쯤 나올 거라고 하더라고. 우편으로 결과를 받아보기로 했으니까 나는 이제 우리 집 우편함만 매일 확인하겠지. 제발 내 허리 아직 쓸만하다는 말이 쓰여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윤희야, 허리가 졸라 아파서 그런지 모든 건 가지고 있을 때 소중히 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껴. 사람들이 흔히들 손에 쥐고 있을 땐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른다고 하잖아. 정말 모든 게 그래. 내 허리도 그렇고. 당연한 건 세상에 없어. 온전히 내 옆에 붙어있을 때 그때 소중히 여기고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 우리도 서로에게 당연한 사이지만 그렇다고 소중함을 잊지는 말자.


결과가 나오고 (제발) 허리가 괜찮다는 걸 알게 되면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하려 해. 걷기나 달리기로. 그게 허리에 좋다고 하더라고. 너도 나와 달리고 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대신 끝나고 뭐 먹으러 가자고 먼저 꼬시는 사람이 10만원씩 내는 걸로 약속하고 만나자. 우리 둘 다 금방 파산 나겠지? 그래도 좋다. 윤희야, 얼른 얼굴 보고 더 이야기하자. 남은 추석 연휴 잘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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